예수님 시대에도 백수건달들이 많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마 20:3-6). 일정한 직업이 없는 날품팔이꾼들이었다. 아침 6시에 가 보니 그런 사람들이 있고, 9시, 12시, 오후 3시, 심지어 오후 5시에도 백수건달들이 시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실업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실업자들에게 일감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포도원 주인이었다. 그 포도과수원은 기업 수준의 큰 규모였다. 별도로 관리인을 두고 있을 정도였다. 주인은 하루 다섯 차례나 저자거리에 나가 그 실업자들을 데려다 일을 시켰다. 그런 기업인을 우리는 ‘실업가’라고 부른다.

실업자와 실업가, 글자 하나 차이다. 그것도 한글로만 쓰면 첫 글자가 아닌 맨 마지막 글 자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그 두 계층의 실생활에는 엄청난 차별이 있다. 실업자 가족은 굶기를 밥 먹듯 할 수도 있다. 자녀 교육이 불가능하다. 중병이 나도 치료를 받지 못한다. 집이 없는 노숙자 신세일 수 있다. 술에 중독이 되고 범죄자로 전락할 수도 있다. 어디에서나 사람 대접을 못 받는다.

예수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일으키신 혁명 가운데 하나가 ‘실업자를 실업가로 바꾸어 놓으신 일’이다. 자신도 일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셨는데, 이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부지런히 일하시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셨다(요 5:17). 이런 실업가 정신은 초대교회로 이어졌으니,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식량을 먹으라(살후 3:10,12)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이전의 한국은 놀고먹는 실업자들을 부러워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오자, 온갖 악조건을 이기고 성공하는 실업가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는 나라로 바뀌고 있다.

한국에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거나 자살한 실업가들이 꽤 많다. 그 가운데 ‘장로’ 직분을 가진 이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집사나 권사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바르게 사업하지 못했다는 질책이 교회 안팎에서 쏟아진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기독실업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권력자들과의 불화설도 들린다.

예수님은 부자들에 대하여 경고를 내리셨다. 부자 청년에게는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 청년이 결단을 못 내리고 떠났을 때에는 그 유명한 말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선언하셨다(마 19:16-26).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은 기업을 잘 경영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도록 크게 격려하셨다. 달란트의 비유, 열 므나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장사하기 겁나면 그 자본을 은행에 저축하여 이자를 받아야 했다고 질책하셨다(눅 19:23). 기를 쓰고 실업가가 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실업가가 되는 목적은 세상 실업가들과 다르다. 하나님의 사업을 돕기 위한 것이 그 첫째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 가운데 가난한 실업자들에게 직장을 제공하는 것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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