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로마서 12:10a).

우정 어린 사랑 가운데- 서로를 향해 온화한 애정을 기울이며!

로마서 12장 10절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를 직역하면 "우정 어린 사랑 가운데- 서로를 향해 온화한 애정을 기울이며"입니다. 헬라어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랑에 대한 단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 혹은 성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에로스', 가족 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스톨게', 친구 사이의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 그리고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혹은 신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입니다. 이 구절은 필리아, 즉 상호 공동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 사이의 사랑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나오는 명사는 필리아와 스톨게의 결합형으로 이 단어는 오직 본문에서만 단 한 번 사용되고 있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단순한 친구들 사이의 사랑에서 가족들간의 사랑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레온 모리스는 이런 종류의 사랑의 독특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한 다른 그룹들(에세네파를 위시한 당시의 다양한 종교단체들)에서는 형제적 사랑이라는 이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을 특별한 의미에서 가족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였으며 그들은 모두 형제자매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직 혈연적 가정 안에서만 가능한 사랑으로 서로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는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랑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랑은 피상적인 사랑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말하는 "형제님, 자매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에 염증을 느낍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말 그대로 형제자매였습니다. 그들은 가정공동체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새 가정이 되어 형제자매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 공동체는 형제에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어느 도시에나 공동체의 모임을 위하여 자기 집을 제공하는 한 가정 혹은 여러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집의 주인들은 흔히 그들 자신이 선교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대표적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희생적인 자세로 손님 대접을 하면서 자기 집을 공동체 생활의 구심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집을 떠나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원하는 받침점으로도 삼았습니다.

공적으로 여행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고후 8:23) 아니라 사사로운 용무로 출타중인 그리스도인들도 손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낯선 “형제들”의 유숙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자신의 가정을 개방하는 것이야말로 경계선을 타파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방된 새 가정의 모범이었습니다. 가정 공동체라는 공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자매 관계가 구체적으로 실천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8절에선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이란 단순히 교회론적 본질을 규정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초기교회 공동체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된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수도공동체의 수도사들이나, 같은 종파나 교단의 성직자 동료 간에만 쓰이지만 초기교회에서는 공동체 내의 당연한 호칭으로 형제와 자매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형제와 자매란 곧 그리스도 신앙의 친구, 그리스도인 교우를 뜻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형제, 자매 관계는 종말 성령의 부여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성령의 체험은 마지막 때를 위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합니다(롬 8:14-16, 갈 4:5-7).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딸이라는 의식에 의하여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 형제와 자매라는 호칭은 그들의 살아있는 정신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고 반복되는 삶의 강령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가정 안에서 "서로 우애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형제와 자매가 되었으므로 서로를 향해 진심 어린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 씀씀이를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참된 애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변사회가 요구하는 온갖 왜곡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휘할 기회를 활성화함으로써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존재임을 깨닫고 느끼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변함없는 사랑과 친밀을 확인하고 더 큰 모험의 삶으로 기꺼이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참된 하나님 백성들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자의 힘

진짜 사랑하면 사랑 받는 자의 행동 하나 하나에 저절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받는 자가 기뻐하면 자신이 무엇을 얻은 것보다 더 기뻐하게 됩니다. 사랑 받는 자가 아프면 자기 살을 도려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여겨집니다. 생각하거나 이유를 따져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사랑을 알고 실천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입으로만 "형제와 자매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건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바로 그 사랑을 삶의 현장에서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우정 어린 사랑 가운데- 서로를 향해 온화한 애정을 기울이며!"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 사랑을 실천하고 보여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아! 이 사람들이 정말 서로 사랑하는구나. 이 사람들의 얼굴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때,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세상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에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파송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연속해서 물으신 후에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당신의 양을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바야흐로 베드로가 주님의 양을 먹이는 목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의 양을 맡기시면서 걱정 말라든지, 내가 네 곁에 항상 머물 것이라든지, 권능을 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 아니라 두 팔을 벌리고 옷을 입혀 남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의미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갖은 고난을 당하시고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진짜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의 양들을 먹이게 됩니다. 베드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이끌려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자가 힘을 발휘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이 사랑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상대방이 기쁘면 함께 기뻐하고, 상대방이 슬프면 함께 슬퍼하는 것, 상대방의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 사랑을 모른다면,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도 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참된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중심이 된 목사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물론 그들도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양들을 돌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꺼이 두 팔을 벌리고 남이 원하는 곳으로 기꺼이 가려고 하는 목사들은 없습니다. 가르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독교 지도자는 극히 사사로운 일인 띠 띠우는 것조차 남이 하도록 허락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사랑 받는 자가 힘을 갖는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그곳을 성령께서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외로운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멸시 받는 사람들, 병들어 버려진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밥 한 끼와 마음이 담긴 말 한 마디, 사랑이 담겨 있는 따스한 손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새 가족 안에서 형제애를 통해 습득한 사랑으로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