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에 대해서 3 :
겸손해지기 위한 세 가지 고백

지극히 낮은, 흙과 같은 겸손을 갖추기 위해서는 아래의 세 가지 진리에 동의해야 한다.

첫째, 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피조물이라는 것)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부모들의 산아제한을 통해서가 아니라) 태어났다. 그러니 피조물로서 우리들의 삶의 목적은 창조주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은 이럴 때 적절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경계하라. 그분에 대한 헌신의 최대의 경쟁자는 그분을 섬기는 활동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지 그분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유진 피터슨도 『메시지』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갈라디아서 3:8-17의 말씀을 현대인의 언어로 다시 쓰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는(embracing) 것”이라고 했다. 이런‘거룩한 피동성’이 우리를 성취 중심의 세상과 멀어지게 하고, 율법적인 의와 교만에서 벗어나게 한다.

둘째, 나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창세부터 오늘까지 우리는 죄인됨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죄성은 태어나기 전부터 유래됐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능히 알리요마는”(렘 17: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속되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우리가 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뿐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죄인됨에서 해방되고 싶을 때, 혹은 죄인이 아니라는 확인이 설 때가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때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사도 바울을 존경하는 것은 그의 업적에 있지 않고, 어쩌면 주님을 만났고, 성령에 속한 그였고, 죽기까지 성령을 좇아 산 그였지만, 로마서 7장 14-17절의 말씀에서처럼 그 역시 우리와 동일하게 자신의 죄인됨을(위대함이 아니라) 인정했고, 여전히 영육간의 갈등 가운데 처해 있는 이중적인 자신을 고백한 용기 때문이 아닐까?

일반인들이 추호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는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를 비롯한 수많은 영성의 대가들이 일관되게 고백해 왔듯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더 많이 깨달아 알수록, 그래서 단지 죄인이 아니라 죄인 중의 으뜸 죄인임을 고백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그 은혜의 양과 깊이도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지며, 영적인 자유를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이다. 일반 성도와 위대한 성인과의 차이를 다른 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 자신의 죄인됨을 더 많이 인정할수록 우리는 성인의 모습으로 더 많이 성화되어 갈 것이다.

셋째, 구원을 비롯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는 사도 바울의 질문에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고전 15:10)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나 자신의 것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업적과 태생과 인종에 상관없이 ‘선택되었고(chosen)’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called).’ 잊지 마라! 이 선택의 chosen과 부름 받은 called는 수동태라는 것을! 그러니 우리들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결정하고 분별하는 모든 것 역시 장애신학의 대가인 마르바 던이 그녀의 책 『우물 밖에서 찾은 분별의 지혜』에서 강조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삶의 전부임을 고백할 줄 아는 자라면, 이제 은혜를 받고 감사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과 같이 수고하고, 예수님이 허락하신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롬 8:17).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디트리히 본 회퍼가 말한 대로, ‘값싼 은혜주의자’가 된다. 분별하는 자가 된다는 것과 값싼 은혜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구분하길 바란다. 거저 주는 은혜에만 목마른 자! 주님의 고난은 피하되 복만 받기 원하는 이기주의자, 상황주의자! 회개는 하였으되 보속(補贖: 회개 후 자신의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하는 의미로 예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는 행위)은 없는 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약 2:17)이라고 야고보 사도가 말하지 않았던가?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사사기의 기드온을 보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복을 받았지만 그 어떤 고난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했고, 겉으로는 왕의 자리를 수락하지 않았으나 실질적인 왕의 지위와 부를 탐닉했으며, 다음 세대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도록 원인을 제공했고 결국 자기 집안의 몰락을 가져온다.

겸손의 결정판은 주일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그럴싸한 립서비스에 있지 않다. 겸손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것”(마 16:24)이다. 분별의 결과가 비록 본인이 원하는 바가 아닐지라도, 주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가라는 대로 가는 것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 예정된 분별의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 위의 세 가지 진리에 각각 ‘아멘’으로 화답하고, 혹은 이러지도 못하는 우리들의 비천함을 재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창조된 자로서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하고, 우리의 의지로 죄를 지었고, 하나님을 멀리 했으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이런 기본적인 사랑과 은혜로 덧입혀진 신앙의 인정과 고백이 없다면, 부부가 결혼서약을 하는 것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즐거우나 슬프나 고통스러우나 변함없이 앞으로 주님과 함께하겠다는 겸허하고 굳센 의지가 없다면, 분별의 결과는 오직 인간의 헛된 영광만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가 즐겨 쓰던, 그리고 우리의 매일의 고백이 되어야만 할,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는 찬사는 더 이상 그 의미가 없어질 거고, 대신 인간들의 오물로 더럽혀진 인간의 영광을 위한 잔치가 될 것이다. 400년 전 이냐시오 성인이 당부했던 ‘아게레 콘트라(agere contra)’ 즉 ‘우리 자신에 반대해서 살아가라’는 말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겸손의 천적인 교만과 함께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우리의 본성인 흙과 같은 겸손과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은혜된(graced) 겸손을 발견하고 인정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겸손의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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