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영국 런던 대학교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법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191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간디에게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이런 기도의 시를 지었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내 자신의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산마루서신』이주연)

위의 시에서 타고르가 말한 “신”은 어떤 신일까요? 당연히 힌두교의 신, 즉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범신론의 신입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위의 시에 나오는 신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이 시를 인용하거나 애송하기도 합니다. 시 자체로만 볼 때, 이 시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노래한(기도한) 시(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타고르의 이 시에 공감할까요? 그것은 타고르가 일반사람들이 쉽게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하더라도 거부하고 싶어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누구나 꺼리면서도 공감하는 내용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을 통해, 누구나 공감하는 그 내용을 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고, 우리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들여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타고르가 갈망한 그 기도 시에 대한 답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1-2).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나야 할 물”을 막아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건너야 할 강”도 없애 주겠다고 하지 않셨습니다. “한가운데로 지나야 하는 불”도 잠재우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물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불 가운데로 지날 때,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형들에게 팔려 애굽 바로왕의 친위대장의 노예가 된 요셉을 가리켜 성경은 “형통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인간적인 관점에서 요셉이 정말 형통한 사람이라면, 아버지가 계신 고향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는 애굽에 있었고,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분상, 환경적으로 바뀐 게 없는데 어떻게 요셉이 형통한 사람이라는 칭함을 받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매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체험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한 형편이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형통한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는냐를 결정짓습니다.

힌두이즘을 추종했던 타고르의 지적은 맞습니다. 우리에게 위험이나 고통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오히려 고통과 위험을 이길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타고르와 그의 시를 공감하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신의 손길”이 그들에겐 없습니다. 타고르가 갈망하며 노래한(기도한) 것에 대해 아무도 답해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노래한(기도한) 신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성경적인 형통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혹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답은 외면한 채, 일반인들이 공감한다는 이유 때문에, 타고르의 시에 취해 성경의 답을 외면한 일부 그리스도인들처럼, 성경에서 답을 찾기 보다 세상에서 답을 찾고자 한 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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