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가난을 묵상할 때, 우리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핵심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형통함입니다. 과연 어떤 것을 형통하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 신앙을 통해, 혹은 기도를 통해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요?

이제까지 제가 만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목소리로 오늘날 기복주의에 물든 기독교를 지탄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기독교는 결코 기복주의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실제로 구하고 바라는 것은 기복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을 그분들의 삶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기도 제목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또 그분들이 감사하는 내용을 보아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솔직하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도 기복주의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고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직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스님들이 출가하는 것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려는 것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고 참 자아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참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택하는 길은 합리화라는 방어기재를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 '다들 그렇지 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지적하면 불 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이럴 때는 꼬리를 내리고 자신을 폄하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게', 만일 그런 분들이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오히려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부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만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은혜의 순간을 저버리고, 죄의 법을 계속해서 따르겠다는 의지의 천명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생각하는 형통함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했음에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는 이 일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여정에 들어가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형통함이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의 의미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어린 시절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당시로서는 문제라 여겼던 상황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쉬운 예로, 무서운 개가 있어도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그 개가 그다지 두렵지 않습니다. 평소 자신을 못살게 굴던 아이가 있어도 아버지와 손을 잡고 있을 때는 오히려 그 아이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누구라도 이런 식의 크고 작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 역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난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동행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주님과 동행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렵습니다. 그 과정에는 주님 이외에는 그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극한 가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님과의 동행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든 대책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전심으로 그분을 붙잡고 모든 것을 의탁할 때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형통함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통함

그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성서의 인물이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면밀히 살펴보면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또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다른 아들들의 시샘을 받을 정도로 유복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형들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정도로 천진무구한 아이였지만, 형들에게 그의 꿈 이야기는 그가 입고 있는 채색옷과 더불어 단순한 시샘을 넘어 살의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불공평한 처사였습니다. 결국 이방 사람들의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성서를 읽는 이들은 그 당시 요셉이 받았을 충격과 실의를 간과하며 요셉의 이야기를 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시기를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정말 사심이 없었습니다. 형들을 무시하려는 의도 역시 없었습니다. 자신이 받았던 특혜를 의식할 정도로 성숙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형들을 사랑했고, 형들을 위해 기꺼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토록 믿고 사랑하던 형들은 요셉이 생각하는 것처럼 믿을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의 편애에 상처 입고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승냥이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은 아픈 상처를 남기고, 분노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분노는 때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요셉도 그랬을 것입니다. 어린 소년에게 노예의 삶은 녹녹치 않았을 것입니다. 폭력과 굶주림이 주조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족장의 아들이었던 그의 자존심이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모멸감이야말로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함과 모멸감은 그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에게는 자신에게 닥친 힘든 일상을 타개할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가 의지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신실하고 형통하기 때문에 그를 배신하였을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망의 상태에 다다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그는 극한 가난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와 달리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하나님이라는 희망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희망을 붙잡은 그 순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

어릴 적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공이 탐관오리를 만나 위기에 처합니다. 옥에 갇히고 마침내 목숨이 날아갈 위험에 처합니다. 망나니가 칼을 내리치려는 바로 그 순간 "암행어사 출두요!"라는 외침과 함께 암행어사가 나타나 주인공을 구합니다.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암행어사 출두"라는 외침을 듣는 순간 함께 박수를 쳤습니다. 그 박수 소리가 새삼스럽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그리스도인들이 관객들처럼 박수를 쳐야 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형통함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순간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성서적인 형통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변함없이 인생의 높은 파고가 닥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더 이상 인생의 높은 파고를 아랑곳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형통함과 신실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모든 일(범사)이 형통해집니다. 범사에 형통함은 곧 범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범사에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이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우리의 삶이 코람데오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죄의 법에 사로잡힌 욕망의 존재인 인간에게 코람데오의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기사에서 괄목할 만한 일 가운데 하나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사건입니다. 보디발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하나였고, 그의 아내 역시 당대 최고의 미녀였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여인이 혈기왕성한 젊은이를 유혹합니다. 더구나 그 여인은 주인이기도 합니다. 그런 여인의 유혹을 이기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일은 아무리 초인적인 인간이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불가능한 일을 해냅니다.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불륜을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인간의 편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신실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과제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극한 가난 속에서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편에서 할 일은 신실한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적 형통함과 신실한 인간의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도 아니고, 어느 것이 나중도 아닙니다. 그것은 동전과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오늘날 범죄한 목사들이 이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형통함과 가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는 형통함이 가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은 단순히 성서적 형통함의 관문으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형통과 함께 갑니다. 요셉의 기사에서 '형통'이라는 단어가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 이후에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형통이 사용되었을 때 요셉은 가난한 자였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 부자가 되었을 때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랜 기간 훈련을 받은 요셉이 하나님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권력자가 된 요셉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습니다. 범사를 능히 자기 손으로 담당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제아무리 훈련된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요셉의 기사를 읽어 내려가지만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혼인한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야곱의 기사에서 야곱이 아내를 얻고자 먼 곳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까지 가야 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해집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았던 에서의 선택이 잘못된 일임을 성서 기자는 감추지 않았습니다. 또 요셉은 흉년과 기근이라는 자연재해를 이용해 많은 땅을 바로의 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권력자의 편에 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요셉이 애굽의 총리였다 해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난민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이 가난과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형통한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형통함으로 그들을 인도합니다. 그러나 부하려 하는 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부자들은 형통함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견해입니다(딤전 6:9 참조).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384장)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찬송가의 가사처럼 만사형통합니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텐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 생각대로 하려 들고, 조금만 어려움에 부딪혀도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게 아닌가, 의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형통함을 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일관됩니다. 하지만 헛된 형통을 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 형통함은 가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통함의 관문으로서, 그리고 형통함을 지속하는 방편으로서 가난은 그야말로 필수불가결합니다. 결론적으로 성서적 의미에서 가난과 관련 없이 이루어지는 형통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난 없는 형통함을 구하는 마음이 바로 부하려 하는 자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기꺼이 가난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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