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로마서 12:12a).

다른 희망

세상 사람들의 희망은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 다 가져보고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다 누려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의 의미를 하나님을 섬기면 재물을 미워하는 것이고 재물을 섬기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섬기고 재물을 싫어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그래도 돈은 있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희망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말하는 희망이 진정한 희망임을 확신하며 세상을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결코 편한 세상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을 어려움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어려움들을 똑같이 겪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돈 때문에 살고 죽지 않습니다. 그 희망은 결코 소멸하거나 우리를 실망시키는 경우가 없습니다.

한 신학자는 "어떤 상황은 심각하지만 나아질 가망이 있고, 또 어떤 상황은 나아질 가망은 없으나 심각하지 않다."고 그리스도인이 직면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아질 가망이 없는 심각한 상황이란 그리스도인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혜 가운데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을 주지 않으십니다. 또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말함으로써, 삶에서 직면하는 심각한 상황들이 결코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해줍니다.

로마서 12:12a는 어려움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심각하지만 희망이 없지 않은 상황 속에서 희망을 생각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또 희망이 없지만 심각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는 고통 가운데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 희망 가운데 - 기뻐하며! 곤란 중에 - 견디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 희망 가운데 - 기뻐하며!

로마서 12:12a 역시 경구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명사 "희망" 앞에 "그"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정관사가 그 명사를 어떤 특정한 희망을 가리키는 말로 만들어 줍니다. 이어지는 분사 형태의 동사는 완료시제입니다. 우리는 그저 잠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그 희망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때, 우리 마음은 지속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되면 원한 기쁨이라는 면류관을 받습니다. 끊임없이 악의 세력들이 괴롭히고 그 면류관을 빼앗으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슬픔과 한숨은 마침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오직 스스로 기쁨의 면류관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선물을 거부할 때뿐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그와 같은 기쁨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모든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희망에 대해 상당히 뚜렷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5장에서 그는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가진 '자랑하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일종의 희망 신학을 제시하였습니다. 로마서 5장은 지금까지 살펴 본 12장과 동일한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을 통해 설명한 것들을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거룩한 즐거움과 신성한 기쁨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

로마서 5장 1절 역시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바울은 그 접속사로 연결지으려는 내용들을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앞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능케 하는 화해를 믿음을 통해 받는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다시 한 번 정리해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가 제시하려는 교리의 함축된 의미들과 그 교리를 연결 짓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1절이 제시하는 첫 번째 함축된 의미는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아들의 칭호 전체를 사용함으로써, 그분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주권 모두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실 때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시키십니다. 우리는 이 말을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주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과연 주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시는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칭의 교리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우리는 믿음으로써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그 은혜 안에 지금 '서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설명은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우주의 창조주이자 세상의 심판자이신 분의 보좌 앞에 우리가 담대히 나아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은총 가득한 사랑 아래 담대히 서서, 그 사랑이 우리를 용서하며 해방시키며 새롭게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1절과 2절에 사용된 두 개의 동사들을 바울은 의도적으로 완료시제 형태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그것이 단 한 번에 끝나는 행위로서, 그 효과는 그 후로도 지속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 동사들은 우리가 언제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은혜 안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본질입니다. 일단 우리가 그분의 선물을 받아들였다면, 우리에게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그분을 거부하고 그분의 은혜를 거절하지 않는 한 그것은 계속됩니다.

2절이 말하는 '이신칭의'에 내포된 세'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희망, 즉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모든 약속들이 완전히 성취될 것에 대한 희망 가운데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완전히 드러내시고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현존을 누리게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최종 완성에 대한 기대와 확신 가운데 지금 미리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희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현재를 위한 희망과 영원을 위한 희망,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옛 시대는 폭력과 파괴와 죽음의 세력들이 지배하는 희망 없는 시대지만,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됨으로써 이미 새 시대가 이 옛 시대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그 희망의 완성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실현될 궁극적인 완성에 대한 보다 심원한 기대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에 대한 이 같은 설명은,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성숙도에 따른 세 가지 차원의 자랑 가운데 첫 번째 자랑을 가리킵니다. 첫 번째 것은 '영광의 희망' 안에서 갖는 즐거움, 즉 현세와 영원한 세계에서 구원받은 가장 기본적 사실에 대한 즐거움을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됨이니"(3-5).

바울이 연이어 말하는 두 번째 즐거움은, 심지어 고통 가운데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연단을 낳으며, 연단이 희망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 다시 희망으로 돌아오는데, 이때의 희망은 앞서 말한 영광의 희망보다 더욱 깊은 차원의 희망입니다. 이는 '고통의 희망'으로서 하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결국 우리에게 선한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인내, 연단, 희망은 그분이 우리의 삶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창조해 내시는 선한 것 가운데 몇 가지로서 우리 신앙의 성숙한 면모이기도 합니다.

이제 바울은 이 주제를 확장하여 그러한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입니다. 그는 주관적인 증거와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6-8).

첫째, 우리의 희망이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임에 대한 주관적 확증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존재 안에서 이미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객관적 확증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희망이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임에 대한 절대적 보증입니다.

왜 십자가가 그토록 분명한 증거가 되는지 바울은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최고의 확증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언제' 죽으셨는지 그 자체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여전히 무력하며 불경건하며 불의한 죄인들이며 원수들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 네 용어는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때의 우리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바울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논합니다. 바울은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도 그를 위해 다른 사람이 대신 죽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고 단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믿지 않았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먼저 우리가 변화되어 의롭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그분이 그렇게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무력하고 불경건하며 죄인이며 원수들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심과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분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흔들릴 수 없는 장엄한 희망의 이유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논의를 '더욱'이라는 문구가 담긴 구절들을 통해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9-10).

첫째 그는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둘째 만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면, "더욱 그의 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단언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이란 없다고 확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고통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안에 키워 주기 위해 이처럼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증거들이 우리가 고통 중에도 그분의 목적에 대해 그분을 신뢰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분을 신뢰하는 삶은 우리를 보다 깊은 수준의 영적 성숙으로 인도해 준다고 말합니다. 이 수준에서는 하나님이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서 이끌어 내실 선에 대한 확신조차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이 세 번째 자리에서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그분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 기쁨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바로 그것뿐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기뻐하며, 오직 그분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기쁨. 기쁨. 기쁨!

지금까지 설명한 이것이 바로 어떠한 심각한 상황도 결코 절망적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라도, 그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분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장엄한 기쁨의 절정인지요? 하나님만이 우리가 크게 기뻐하고 자랑하기에 합당하신 분이며, 그분만이 기쁨의 원천입니다.

이렇게 희망 중에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망 그 자체보다도 더 깊은 실체, 즉 바로 하나님 자신에 기초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끝부분에서 다시 이 주제를 끄집어내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하나님은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15:13) 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 희망의 충만함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것이지만, 때때로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그 희망의 범람을 직접 경험하기도 합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암담하기만 한 시절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인지 의심스러웠고, 계속 살아야 할 이유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습니다. 오직 방충망을 열어젖히고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절망과 좌절의 두꺼운 안개 속에서 헤매던 그 어느 날 이미 익히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실 하나가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내가 실패해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너무도 평범한 그 사실이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내가 계속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현실은 암담했고 비탄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제 안에서 샘솟듯 솟구쳐 올라오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의 개념과 행복의 개념은 많이 다릅니다. 행복은 전적으로 외부적 환경에 달려 있습니다. 삶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가지 행복의 선물들이 있습니다. 상쾌한 공기, 고소한 음식 냄새, 멋진 노을 빛,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 사랑하는 이들의 만남 등 일이 잘 풀리고 있을 때, 자신의 존재가 인정을 받는다고 느낄 때 행복합니다.

한편 삶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 비탄에 젖습니다. 병이나 힘겨운 환경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두려움과 좌절감을 느끼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 세상의 온갖 악들은 우리를 절규케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와중에서도 기쁨은 변함없이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환경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이 행복이든 슬픔이든, 어둠이든 빛이든, 우리의 기쁨은 변함없이 우리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우리의 희망 안에, 희망보다 더 깊은 실재이신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런 문장들을 좋아합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무오류한 표지다." "기쁨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이다." "우리 마음에 휘날리고 있는 기쁨은 그곳이 왕이 거하고 계신 성임을 알려주는 깃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또 그것을 갈망할 때 하나님은 함께하심을 느끼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의 현존과 함께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 삶의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현존이 희망을 가능케 합니다.

이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주관적 증거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통해, 거듭 그분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명하셨습니다. 거기에 어떤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저녁 아홉 시 반부터 자정 후 반 시간쯤까지. 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실한 것, 확실한 것. 감정. 기쁨. 평화. 하나님이신 것과 세상을 망각함.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파스칼이 죽은 후 그의 옷섶에서 발견된 쪽지에 적혀 있던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은총의 체험을 적어 자신의 심장 가까이 두고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자주 이 쪽지를 만졌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을 파스칼은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파스칼처럼 은총의 체험을 느끼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인생의 파도 속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오늘 사도 바울이 권고하는 내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돈의 위력에 굴복한 사람들의 귀에는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교회 안에서나 동의하는 교양이거나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흰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님으로 믿으며 내게 주어진 모든 삶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믿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만 복음은 복음이며, 그 희망이 참된 희망이 되며 파스칼처럼 심장 가까이에서 늘 속삭이는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복음을 향해 가는 바른 선택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강요할 수 없는 스스로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는 저 자신 역시 언제라도 흔들리거나 나가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지체들로서의 하나님 백성인 동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을 살아 복음 자체가 분위기가 되는 참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인생과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돈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 어떤 것을 선택했는가?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 없음을, 연약함을, 불경건함을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된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와 원수 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 이미 주어져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이며 주님이 약속하신 그 희망을 바라보며 기쁨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 가운데 - 기뻐하며!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에게 다가와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생명의 역사가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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