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0일 저녁 9시경, 서울에 있는 숭례문(남대문)이 채씨 성을 가진 70세 남성에 의해 방화(放火)되었습니다. 이 화재로 한국의 국보 1호 숭례문은 석축(돌로 쌓아진 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전소되었습니다. 방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고양시에 있는 자신의 토지가 재개발되는 과정에서 시공사(施工社)로부터 보상을 충분히 받지 못해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해결되지 않자 그에 따른 분노로 방화한 것이었습니다.

채씨는 “오죽하면 이런 일을 하겠는가”라는 제목의 넉 장짜리 편지에 토지 보상금 문제, 민원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데 대한 서운함, 사회에서 받은 냉대에 대한 이야기를 빼곡하게 적었습니다: “억울함을 수차례 진정했으나 정부는 한 번도 들어 주지 않았다.” “회사편만 드는 판사는 없어져야 한다.” “창경궁에 놀러 갔다가 불난 곳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방화범으로 몰렸다.” “변호사가 수차례 거짓 자백하라고 했다.” “정부는 약자를 죽인다.” “나는 억울하다.” 처음에는 토지 보상 문제로 출발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그의 분노는 건설회사, 판사, 경찰, 변호사, 정부 등 사회 전반으로 확대 재생산된 것이었습니다.

마이애미 대학교의 마이클 매컬러 연구팀이 “분노”와 관련한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연구팀은 300명의 대학원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눈 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체적인 공격을 받았거나 기분이 크게 상했던 사건(배신, 모욕, 퇴짜 등등)을 하나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첫 그룹인 100명에게는 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기술(記述)하되 자신의 삶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하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그룹인 100명에게는 그 사건에 대해 기술하되 그 일로 인해 발생한 유익한 점에 초점을 맞추도록 했습니다. 나머지 그룹에게는 피해 사건에 대한 기술과 함께 단순히 다음날의 계획에 대해서만 쓰라고 했습니다.

조사가 끝나갈 무렵, 300명 모두에게 그 사건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물었습니다. 그 결과, 첫번째 그룹(그 사건으로 인해 발생된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한 그룹)과 세 번째 그룹(그 사건에 대한 단순한 기술과 함께 다음날의 계획만을 작성한 그룹)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두드러졌고 그들에 대한 용서의 마음이 적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그룹(그 사건으로 인해 생긴 유익한 점을 기술한 그룹)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하려는 마음이 아주 많이 있었고, 그들에 대해 보복을 하거나 그들과의 만남을 피하려는 생각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59 Seconds」by Richards Wiseman ).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숭례문 방화자 채씨의 입장이거나 또 다른 어떤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면 어떤 행동을 취했겠습니까?

마이애미 대학교의 연구팀이 보여 준, 어떤 사건의 피해로 인해 생긴 분노와 관련된 우리의 바람직한 행동은 “피해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이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감사 내용”을 찾는 것입니다.

70년 이상을 무신론자로 살아오다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어령(이화여대 명예교수)씨는 한국 근대 문화사와 관련한 화려한 수식어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굴곡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감사”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향하는 감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평화를 위한 감정이다. 감사하는 행위, 그것은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감사하라”(살전 5:18; 골 4:2; 빌 4: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어떤 일의 결과 여부에 상관없이 늘 감사에 초점을 맞출 때, 그 감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19세기 미국의 설교가이자 사회개혁가였던 Henry Ward Beecher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은 감사하는 마음을 죽인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은 감사를 자라게 하는 토양이 된다. 자긍하는 자는 좀처럼 감사할 줄 모른다. 결코 자기가 받을 만큼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평소에 얼마나 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에게 손해가 온 상황에도 늘 감사하고 있습니까? 만약 감사 생활이 부족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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