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공항을 이용할 때의 일이다. 보통의 경우 자동차를 몰고 가서 공항 근처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은 다음 비행기를 이용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셔틀 버스를 이용해야 하므로 그 시간을 감안해 일찍 출발해야 한다.

그날도 두 시간 반 가까이 일찍 공항 근처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셔틀버스가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공항 주변의 길이 막혀 늦어지고 있다는 거였다. 그날 따라 LA 공항 근처는 매우 복잡하여 겨우 탄 셔틀 버스가 20분 이상 늦게 공항에 도착했다. 약 한 시간을 허비한 셈이었다.

해당 터미널 입구에서 내린 후 탑승권을 발급받기 위해 항공사 부스로 간 나는 또 다시 신음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특별 연휴기간도 아닌데 왜 그리 사람이 많은지, 검색대로 이어진 줄이 뱀꼬리마냥 길었고 그것도 지그재그로 여러 겹이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 1시간 20분 전. 제 시간 안에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일단 줄을 서서 줄이 줄어드는 시간을 체크해 보았다. 이대로 가면 도저히 비행기 출발 30분 전에 게이트 앞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몇 미터 앞에 보인 한국 사람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체면을 무릅쓰고 민족과 국적을 빌미삼아 사정을 이야기했다. 덕분에 10여 명을 건너뛸 수 있었다. 그래도 속도는 여전히 느렸다. 급기야 안전요원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만 도와달라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요원은 내 부탁을 들어 주었다. 약간은 한심한 듯한 표정까지 지으면서... 그래도 그 요원 덕분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건너뛰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줄은 계단 위로 이어졌다. 계단을 올라가 보니 이번엔 다른 곳에서 온 줄과 합쳐지는 병목 지점이 있었고, 또 다른 요원이 줄을 관리하고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탑승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약 20여 분. 신분 확인 과정, 검색대 통과 과정 등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다음 요원에게 부탁했다. 최대한의 미안함과 초조함을 드러내면서... 그런데 이번의 안전요원은 처음 사람 같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그건 네 잘못이다. 여기 사람들 다 바쁘다” 라며 제 자리로 돌아가라고 손짓할 뿐이었다. 맞는 말이고 그 태도가 너무 엄격해서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속이 탄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표현이다.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다, 가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못 가면 어떻게 하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주눅든 마음을 다시 챙겨 다시 그 요원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다시 거절. 동향을 살피다가 조금 후에 한 번 더 부탁했다. 그러자 매우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길을 터주었다. 그러고도 검색대 앞에서 앞 승객의 배려를 구해야 했고, 가방을 챙겨 전력 질주한 결과 게이트 문이 닫히기 직전에 탑승할 수 있었다. 숫기 없고 체면을 중시하는 내가 사람들의 눈총을 의식하면서도 여러 번 부탁하고 거절과 능멸에 가까운 표정을 접하고도 끝내 탑승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한편 대견하기도 했다.

‘이런 게 집념? 불굴의 의지? 도전 의식인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찬송을 불러야 할까? 강청기도의 예화로도 사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사정의 다급함 때문에 안내요원은 질서와 원칙을 어겨야 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급한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들의 기회를 먼저 사용한 셈이 되었다. 일부러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니고 상습범도 아니다. 누구나 그런 일을 겪을 수 있다. 이른바 긴급피난에 해당하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 나는 질서를 어겼고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쳤다. 그것을 특별한 은혜라고만 생각하고 자랑한다면 누군가에게는 꼴불견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을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내가 누린 은혜를 나누어야 한다는 채무 의식을 갖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문득 한국 교회는 은혜 독점의 독선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빚, 은혜의 빚도 분명히 빚이다. 빚은 갚아야 한다. 자랑과 자아도취는 그만하고 이제 그 빚을 갚는 일에 신경을 더 써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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