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중에 참으며”(로마서 12:12b).

고통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더 적은 시련과 더 많은 축복이 하나님 은혜의 증거라는 다른 복음에 매료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로 몰려듭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왜 자녀들을 축복해 주시지 않겠느냐?”면서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고통을 없애 주는 약품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상담,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교회 등에 의해 점점 더 고통을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줄이거나 아니면 아예 없애야 하는 나쁜 것이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호전되기만 바랍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해주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선한 일, 곧 우리의 고통을 없애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복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기독교가 말하는 복의 전부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좁은 생각입니다. 잘못된 이해는 잘못된 기대와 꿈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오묘하고 영원합니다. 그래서 커다란 시련 없이는 도저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인물들과 진정한 신앙인들은 모두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래리 크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로, 모든 참된 복의 근원으로, 우리 영혼에 가장 달콤한 기쁨을 제공할 유일한 분으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좌절된 꿈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깨진 자아와 함께 우리 영혼에 찾아온 깊은 통곡에 대한 유일하면서도 분명한 대답이 그분 안에 있음을 알아볼 때까지는 완전한 포기, 진정한 신뢰는 일어나지 않는다."

꿈이 좌절되고 자아가 깨지기 전까지 우리는 그분을 알고자 하는 갈망도,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도 알 수 없습니다. 완전한 자기 포기와 진정한 신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이 약속하는 진정한 복을 알 수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복음을 그저 지옥을 피하는 하나의 수단으로밖에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완벽하고 고통이 없는 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 순간의 결단으로 폄하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사는 법이 아니라 죽는 법을 가르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에 상관없이 '기쁨이 넘치는 장례식장'이 기독교를 대변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축소시켜 복들로 가득한 작은 꾸러미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열리면 현재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고 다음 생에서는 더욱 큰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힘을 불어넣어줄 그런 꾸러미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지옥에서 건짐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문젯거리를 줄여 만족을 늘이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을 현재의 삶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분이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친구로 알게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른 어떤 기쁨의 근원보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물질을 더 즐거워합니다. 그 이유의 중심에 고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에서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즐거워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못하고 사람과 물질을 더 즐거워하는 이유는 고통을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롬 12:12b는 고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곤란 중에 - 견디며!" 곤란을 견디고 이겨낼 때 인내라는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을 뿐 아니라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 그분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고 마침내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가장 즐거워하는, 참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곤란 중에 - 견디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어떤 상황은 심각하지만 나아질 가망이 있고, 또 어떤 상황은 나아질 가망은 없으나 심각하지 않습니다. 12절의 두 번째 구절은 특별히 나아질 가망은 없으나 심각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려운 일이란 외부로부터 오는 곤란을 의미합니다. 곤란으로 번역된 헬라어 '슬립시스'는 '압박하다' 혹은 '함께 누르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바울이 여기서 선택한 명사는 외부의 압박이나, 고난, 선택권이 좁은 환경으로 강제로 내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곤란에는 직접적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 모두는 외부에서 오는 다양한 종류의 곤란들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직장이나 가정 심지어 교회에서도 온갖 요구로 우리를 속박합니다. 경제적인 몰락, 불의의 사고나 자연재해와 같이 불가항력적인 시련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갑니다. 벗어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시도해 보지만 결국 속수무책인 상태가 됩니다.

희망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런 상황이 우리를 파멸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견뎌낼 것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의미로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마 10:28)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궁극적으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고전 15:42 참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닥친 위기가 무엇이든 부활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견디지 못할 심각한 상황이란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견디며'라는 분사를 인내라는 의미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인내의 의미가 현대에 이르러 너무 약화되었습니다. 본래의 헬라어가 의미하는 '견디어 내다'의 강력한 어의를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인내한다는 것은 그저 진통제가 효과를 낼 때까지, 경쟁과 효율에 집착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인내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온갖 종류의 곤란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른스트 케제만의 지적처럼 "시련은 그저 수동적으로 겪는 것이 아니라 어깨 위에 야무지게 짊어지고 가야 할 어떤 것입니다." 케제만은 시련을 대하는 태도를 일깨워 줍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굳세게 견뎌낼 것을 권면하는데,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 말씀들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 왜 심각한 상황이 아닌지 가르쳐 줍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3-7).

이 말씀은 환난을 견뎌 내는 일에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서로 위로를 나눔으로써 도움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됩니다. 환난을 당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유익이 됩니다. 환난을 통해 하나님께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과의 동행을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환난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환난은 단순한 환난이 아니라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됩니다. 그런 환난은 축복의 통로인 셈입니다.

그뿐 아니라 환난을 통과하며 경험하는 하나님의 위로는 환난 중에 있는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 됩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가 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난 중에 받은 고통과 위로를 통해 이전에 없었던 공감 능력이 생겨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민감하고 절절하게 느끼는 사람이 됨으로써 우리는 위로를 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많이 벌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신앙이라는 화장품으로 덧칠하는 ‘내면의 합리화’를 보지 못합니다. 자신을 순수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돈을 많이 벌어 다른 이들을 돕는다고 해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자선을 베풂으로써 위선이라는 영적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발가벗겨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게 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의 실제를 알게 됨으로써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연약함을 목격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긍휼하게 여길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가난은 언제나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게 함으로써 참된 섬김을 가능하게 하고,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여 영적 성숙을 이루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7-10).

먼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고난에 처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잊혀지거나 낙심하거나 버림 받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환난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인들은 환난에 의해 완전히 파멸하는 경우가 없다면서, 예수님의 생명력은 기독교 공동체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할 때 더욱 충만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는 사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는 사도 요한의 말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잘못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는 말이지, 환난 없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터무니없는 교리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합니다(요 16:33). 인생의 어려움들을 겪게 됨은 물론 그리스도로 인해 당하는 환난이 더해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고난을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몸에 채우"(골 1:24)는 헌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가로 아무런 고난 없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섬김의 길을 걷고자 자기 몸을 내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즐거워하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통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이 하나님의 족한 은혜라는 희망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기쁨의 근거가 되는 진리를 발견했던 일을 그는 이렇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인간적으로 도저히 희망 없는 상황들 속에서도 굳센 인내로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희망이 다른 곳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절벽과도 같은 상황들 앞에서 절망하는 대신,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것들 안에서 기쁨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극복해 내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은혜 안에서 쉬는 법을 배우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을 넉넉히 견딜 수 있게 해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있을 때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음은 물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놀라운 선을 확신하며 고통 중에도 즐거워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의 영적인 거장들은 똑같이 강조합니다. 프란체스코는 큰 병을 오랫동안 앓고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병석에서 일어나 방바닥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제게 주신 모든 고통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당신 뜻에 맞는 일이라면 지금보다 백 배 더 큰 고통을 주십시오. 빠져나갈 길 없이 저를 짓누르는 것이 당신의 기쁨이 된다면 저는 몹시 기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게 저의 가장 큰 위안이기 때문입니다."

에프렘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거친 사람도 자기의 말이나 나귀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서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는다. 또한 도공도 그릇을 구울 때 진흙을 얼마나 오랫동안 불에 구워야 하는 지 안다. 그렇다면 지혜 자체이며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어깨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고통의 불속에 오랫동안 내버려둔다고 말한다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자. 고통의 불은 우리라는 진흙을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달구지 않을 것이다."

에프렘의 말에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뢰가 있을 때 사도 바울처럼 프란체스코나 에프렘처럼 고통 중에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환난과 고통을 기쁨과 인내로 온전히 견디고 이겨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어진 삶을 온전히 완성하게 됩니다. 주어진 고난에 대해 기꺼이 감사할 때 인생은 감사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어지는 인생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삶에 대해 온전히 감사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을 통해 이루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께 드린 사람들을 통해 빛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삶이 주어지든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할 때 주님은 그런 우리를 통해 우리의 삶을 완성하실 뿐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 땅 위에 펼쳐나가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과 환난들이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당연히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정황은 하나님과 떨어져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모든 삶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희망 가운데 - 기뻐하며! 곤란 중에 - 견디며!" 살 수 있습니다. 모든 환난과 어려움을 기쁨과 인내로 이겨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랑이며 영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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