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에 대해서 4 : 확장되는 겸손

우리 자신의 겸손이 확장되고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신뢰할 수 있고 말씀을 삶으로 살아낸 제3자에게 고백하거나 상의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영역의 겸손이 공동체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목회자나 영적인 지도자, 스승이나 멘토 혹은 다른 신도에게 자신의 문제를 상의하고 검토 받을 수 있을 때 우리의 겸손은 그 깊이가 더해지고 폭이 넓어진다. 눈 앞에 보이는 자에게 고백할 수 없는 자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올려드릴 수 있을까? 하늘나라의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다면, 눈 앞에 보이는 자에게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믿음이다.

이런 문제에 맞닥뜨리면 사람들이 늘 하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그 사람을 믿고 말하느냐”고.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여러분은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검증하고 나서 자신을 고백하느냐”고. 하나님과 사람(혹은 이웃)을 이원화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그리고 신뢰는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우리 앞의 사람이 신 곧 하나님의 이미지로 덧입혀진 것임을 알 때(그리고 신뢰할 때), 그를 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다름없어지고, 우리의 겸손은 투명해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 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며 결코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겸손은 이웃, 남에 대한 겸손과 동일하고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게 온전한 믿음이요, 온전한 겸손이다.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빌 2:3)를 새겨 들을 일이다.

서방 세계 수도원 영성의 대가인 요한 카시아누스(360-435)는 사막의 영성에 대해 집대성한 자신의 책 『담화집』에서 분별과 겸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하며, 겸손한 자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신앙의 선조나 스승들의 지침을 따른다고 조언한다.

“그때 아바 모세가 말했다. 진정한 분별은 참된 겸손 없이는 얻을 수 없다. 이런 겸손의 첫 번째 증거는 되어질 모든 일이나 생각들이, 본인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The elders: 신앙의 선배)들의 검토에 붙여져 그들의 이해를 구하고, 선조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선과 악의 분별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침은 젊은이(수도자)에게 분별의 참된 방법을 통해 올바른 길로 가라고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적의 올무와 함정에 의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낸 신앙의 성인이나 선조나 영적인 지도자나 멘토에게조차 상의되지 않는 비공개적이고 은밀한 믿음이라면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분별이란 뜬구름 잡는 소리다. 참되고 지혜로운 분별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주위를 둘러보아 ‘삶으로 신앙을 살아낸(lived faith)’ 믿음의 선배나 영적인 지도자들을 찾아 볼 일이다. 산 자는 찾기가 어려운가? 그렇다면 죽은 자는 왜 안 되는가? 주님 오신 후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쇠하지 않고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전래될 수 있었던 것은 불변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동시에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낸 수 많은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발자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성과 분별의 대가이자 한때 세속의 귀족이요 군인이었던 이냐시오 성인의 회심이 가능했던 것은 작센의 루돌프가 쓴 『그리스도의 생애』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을 읽고 얼마나 많은 자들이 회심을 경험했던가?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수년간 투옥되기도 하고, 해방 후 여순 사건 때(1948)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1902-1950)나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병원비를 낼 수 없는 환자의 체면을 고려해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놓기도 한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한국의 슈바이처, 죽은 후에 묻힐 자신의 공동묘지조차 준비할 수 없었던 살아 있는 성자, 그의 묘비에 쓰여 있는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으로서 한 치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산 장기려 박사(1911-1995)와 같은 이들의 삶은 신앙 가운데 올바른 분별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던가?

산 자이건 죽은 자이건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산 그들의 삶, 특히 그들의 분별의 삶들을 철저히 알아, 배우고, 거룩하게 모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듯이 우리 주위에는 본 받을 자들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 요한 카시아누스가 말한 것처럼, ‘적들의 올무와 함정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다. 하루아침에 성인 된 자는 없다. 그리고 강단 위에서 유창한 설교자가 제단 앞으로 나오라는 요청(영어로는 altar call이라고 함)을 받았다 해도 구원이라는 선물을 공짜로 얻는 경우는 없다. 사도 바울의 은혜가 값쌌던가? 사형장에 나서기까지 믿음을 지켜냈던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의 순교가 값쌌던가?

최선의 분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지만, 현실세계에 있는 우리들의 삶의 여정, 신앙의 여정을 통해 배우고 마스터해야 할 기술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인간세상에서의 성화와 불가분의 관계인 것과 다르지 않다. 500년 전 독일의 마르틴 루터로 인해 사제와 평신도간의 간격을 철폐하고, 오직 믿음과 성경으로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종교의 혁명을 가져왔고, 그래서 21세기의 우리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컨템포러리 음악을 들으며 현대판 예배를 드리게 됐지만, 반면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인간의 말도 믿지 않고, 언제든지 하나님과 성령을 통해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자부하며, 성숙이나 분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래서 하나님 외의 다른 성인이나 영적인 지도자(멘토)들의 지도나 조언이나 공동의 분별 역시 역시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만은 16세기의 루터가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을 반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인 개인주의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 본위의 개인주의가 우리들의 믿음과 교회 가운데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면, 이것은 삼위가 일체 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홀로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

종파나 교단을 막론하고 지혜로운 분별자는 자신의 분별의 인적 서클을 확장하는 자이다(물론 이런 행위도 겸손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 서클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주위에 지혜로운 신앙의 선배나 멘토들이 나란히 있고 그 가운데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분별하며-때로는 영적으로 보호받으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령의 일치를 구하게 된다. 공동의 분별자들에게 예의와 존중을 보이며, 그들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나간다. “아니야, 인간은 결국 혼자야”라고 떠드는 실존주의자들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라! 태초의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셨듯이, 우리의 믿음이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듯이, 우리의 모든 삶과 분별의 행위 또한 삼위일체다운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에 대한 순종과 협력과 존중 안에서 가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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