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의 인격과 신앙(12)

한 사람의 인생 어떻게 결정되나?

한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운명이 인생을 좌우하는가? 아니면 결단과 노력이 인생을 결정짓는가?

인간의 행복(Wellbeing)을 연구조사한 갤럽은 웰빙의 5가지 요소를 언급한다. 그 중 하나가 공동체의 웰빙이다. 공동체의 웰빙은 공동체적인 삶의 안전과 의료, 환경 등을 말한다. 일례로 우간다에서 태어난 소녀와 일본에서 태어난 소녀간에 공동체의 웰빙은 천양지차이다. 우간다의 평균 수명은 2010년 이전까지 약 48세, 일본의 평균 수명은 약 81세였다. 1990년대 이전에는 차이가 더 컸다. 소속 공동체가 어디냐에 따라서 평균수명도 달라진다.

공동체에서 더 좁혀 소속된 가문 또한 인생을 결정짓는 요소이다. 버지니아 대학교의 심리학자 조너선 헤이트는 행복지수를 다음과 같이 공식화했다.

H(행복)=S(설정 값)+C(삶의 조건)+V(자발적 행동)

여기서 H(Happiness)는 영속적인 행복의 수준, Set Point는 이미 설정된 값으로 유전자 등을 말한다. C(Conditions)는 삶의 조건, 인종, 종교, 결혼, 환경, 성 등을 말한다. V(Voluntary)는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자발적 행동을 가리킨다. 즉, 자율성,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긍정성, 몰입, 의미 등을 말한다. 긍정심리학자들은 한 개인의 행복이 이미 S+C로 약 50% 결정된다고 한다. 나머지 50%는 V로서 일개인의 자발적 반응을 통해 결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지 워싱턴의 경우, S+C, 즉 이미 설정된 값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요즘 한국에서 언급되는 금수저, 은수저가 아니었다. 그는 자발적 반응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여 미국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먼저 조지 워싱턴의 선조들과 태어났을 때의 환경을 살펴 본다.

조지 워싱턴의 선조

조지 워싱턴의 고조부 로렌스(1602-1652)는 영국 성공회 신부로, 런던 북동쪽에 위치한 퍼리하이, 에섹스에서 사목했고, 왕에게 충성하는 왕당파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 특히 1642년에 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및 교회 통치자와 청교도 사이에 시민전쟁이 벌어졌으며, 청교도들의 승리로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독재정치(1640-1660)가 시작되었다. 이때 영국 성공회 성직자 약 3천여 명이 박해받고 처형을 당했다. 당시 조지 워싱턴의 고조부는 두 아들 존과 로렌스를 신대륙으로 보내 새로운 삶을 살게 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올리버 크롬웰의 정치와 시민전쟁을 “강탈:usurpation”이라고 표현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증조부 존을 여러 방면에서 존경했다. 증조부는 이민 초기에는 측량기사로 일했고, 인디언과 싸운 식민지 군대의 대령이었다. 버지니아 하원의원으로 10여 년 봉직했고, 성공회 교회에서 봉사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1676년, 버지니아 주지사 버클리의 횡포에 저항해 베이컨 반란이 일어났을 때, 증조부는 반란군의 편에 섰다. 아이러니컬하게 조지 워싱턴도 증조부의 길을 걸었다. 측량기사, 군인, 정치가가 되었고, 영국의 횡포에 맞서 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할아버지 로렌스(1660-1698) 역시 식민지 군의 대위였으나, 38세에 일찍 사망했다. 조지 워싱턴의 아버지 어거스틴(1694-1743)이 네 살 때였다.

조지 워싱턴의 아버지,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어린 시절에 영국의 애플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거스틴 역시 조지 워싱턴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교와 대화에서 예의바르고 품위있게 행동하는 규칙』을 실천에 옮겨 아들의 본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두 아들, 로렌스와 어거스틴 주니어도 영국의 애플비 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어거스틴은 브리지 크릭의 조그만 농장을 상속받았다. 어거스틴은 첫 번째 아내가 죽자 메리 볼과 재혼했으며, 메리 볼에게서 첫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 조지 워싱턴이다. 아버지 어거스틴은 담배농장주였으며, 대장간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어거스틴은 지역 경찰과 판사로 일한 적도 있다. 아버지는 조지 워싱턴처럼 키가 크고 힘이 셌으며 운동을 잘했다. 대장간에서 일할 때에는 두 명이 들 수 있는 쇳덩어리를 실은 마차도 혼자서 들어 올릴 만큼 힘이 셌다고 한다. 한편 아버지는 온유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매너를 지녔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집에 불이 나자 프레드릭버그의 라파하녹 강 근처로 집을 옮겼다. 조지 워싱턴이 어린 시절을 보낸 페리 팜이었다.

어거스틴은 1735년에 지역 성공회 교회의 교회위원이 되었다. 교회위원회는 교인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평신도 지도자들의 모임으로 사제를 도와 선교와 재정,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감당한다. 교회위원은 선서할 때 “성공회의 교리와 훈육을 지키며,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성서의 권위를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한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1762년에 조지 워싱턴 역시 성공회 트루로 교회의 교회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지 워싱턴은 아버지로부터 자상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어거스틴은 1743년 독감으로 49세에 사망했다. 이때 어머니 메리는 37세였고, 조지는 11살이었다. 어거스틴의 죽음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며 신사로서 영예롭게 돌아가셨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사는 동안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내가 만약 분노에 사로잡혔다면 힘센 근육으로 반대자를 죽여 피를 보았을 것이고, 내 영혼이 무거웠을 것이다.”’아버지 어거스틴처럼 조지 워싱턴도 빗발치는 폭풍 속에 말을 타다가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어거스틴은 일만 에이커의 땅과 50여 명의 노예를 남겼다. 재산은 부인 메리와 세 아들 로렌스, 어거스틴 주니어, 조지에게 돌아갔다. 로렌스와 어거스틴 주니어는 현재 마운트 버논이라 불리는 농장을 물려 받았고, 조지는 페리 농장을 물려 받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자, 조지는 영국의 애플비 학교로 유학을 갈 수 없었다. 만약 조지가 애플비 학교로 유학을 갔다면 독립 혁명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운명의 개척자, 조지 워싱턴처럼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 식민지가 많이 정착되었을 무렵에 태어나서 활동했다. 인디언들의 공격이 더이상 위협이 되지 않고 농장들이 많이 개발되고, 영국 성공회가 공립교회로 정착된 환경이었다. 조지 워싱턴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지도 군대에 복무했고, 농장주로서 농장을 관리했으며, 같은 지역에 사는 신사들과 교제하면서 의회에 진출해 정치를 하였다. 그 당시 농장주 아들들은 영국 유학을 갔지만, 조지 워싱턴은 유학의 길이 막히자 독학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조지 워싱턴은 귀족 집안 출신도 아니고, 대농장주의 아들도 아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보통 시민의 아들로 태어나 학력은 초등학교 2학년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버지니아 출신의 많은 정치인들이 대학을 졸업한 것에 비해, 그는 보잘 것 없는 학력에 집안도 대단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운명을 경탄할 만큼 개척해 나갔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까? 조지 워싱턴은 이미 결정된 환경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인생을 개척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새로 쓴 것은 물론, 미국의 역사적 운명을 개척하고 새로 쓴 사람이다.

이제 우리들은 인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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