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로마서 12:17).

혁명적인 전복

복수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구라도 억울한 피해를 당하면 그 피해를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일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복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 대를 맞으면 열 대를 되돌려 주어도 마음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수는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복수로 얼룩져 있습니다. 인간의 그 마음이 각종 첨단무기와 핵무기로 열매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정반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복수라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전복적이며 혁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그러한 반전의 역사입니다. 짐 엘리엇을 포함하여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에콰도르 아우카 인디언들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그 인디언들을 섬기며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이에 감동을 받아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고, 마침내 선교사를 죽인 바로 그 사람이 목사가 되는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구소련이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표방하기 전, 그리스도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온갖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병이 들거나 죽어갈 때 정작 그들을 돌봐 준 이들은 동료 당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16세기 재세례파 신자들은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아 잡히면 사형을 당했습니다. 재세례파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추적자들이 예배 장소를 급습했습니다. 추격전이 벌어졌는데 호수의 얼음이 깨져 추적자가 빠지고 말았습니다. 도망치던 재세례파 신자는 돌아와 물에 빠진 추적자를 호수에서 건져 주었고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재세례파 교회들은 그와 비슷하게 죽어간 이천 명의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적힌 두툼한 책을 읽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신부와 종교 지도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여러 명의 헌신된 신자들이 중앙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섬김의 삶을 살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은 역사 대대로 세계 각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7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이 문장에서 단어들의 순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 구절을 직역하면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2장 6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에서 사용한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일에 대해 공의로 갚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시므로 우리 스스로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뿐 아니라 마음 깊이 감추어진 동기까지 아십니다. 그분이 우리 각자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신앙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그분은 아십니다. 단순히 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우리가 기꺼이 진리의 삶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얄팍한 계산으로 진실을 가리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가장 두려운 경고가 될 것입니다.

분노는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기에 앞서 자신의 심령을 황폐화시킵니다. 상대방에게 표출하기 전에 분노는 먼저 나 자신의 멘탈을 붕괴시켜 요즘 유행하는 '멘붕'으로 만듭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죄악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어리석은 파멸로부터 우리의 심령을 보호해 주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의 품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대신 갚아 주시므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이런 명령에 대해 인간적 본성은 즉각 반발합니다. "하지만 그도 당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는 "그 사람은 우리의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은 너무도 악합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너무 참혹합니다. 하지만 보복이나 복수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연관된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것을 이해합니다.

바울은 이 가르침의 서두를 누구에게도(with no one)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그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부정대명사는 어떤 변명거리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보복이 되도록 유의하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보복이 전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탈리오 법칙과 예수님

이스라엘 민족이 최고조로 발달했던 시기에 유대 율법은 이례적일 정도로 정의로운 법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균등한 보응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

탈리오 법칙으로 불리는 이 율법은 셈족 사회의 특성이었던 끔직한 보복을 막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셈족뿐만 아니라 어떤 민족 어떤 사회건 보복과 복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폭력은 특성상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그 범죄의 정도와 같아야 한다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탈리오 법칙을 실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인간은 결코 받은 만큼 갚는 데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창세기 라멕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타락 이후 인간은 "칠십칠 배"(창 4:24)로 되갚아도 분이 안 풀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탈리오 법칙은 분노의 사슬을 끊는, 절제를 요구하는 정의로운 법이었습니다.

그럼데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진전시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38-48).

그분은 인간적 정의의 모든 기준들을 뒤엎으시고 사랑의 법칙을 주창하셨습니다. 당한 이상으로 보복해서는 안 되는 데 머물지 않고 적들을 적극적으로 섬겨 보복을 종식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공평함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가하든지 사랑과 은혜로 대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 헬라어 동사의 형태는 의지 미래입니다. 그 의미는 '너희가 온전해져야만 한다.'(You must be perfect.)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온전해질 것이다.'(You shall be perfect.)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는 그렇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에게 태양과 비를 베푸시듯이 우리 역시 비폭력, 비보복의 삶을 살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강력한 금지 명령 다음에 바울은 우리 삶의 특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 줍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두 번째 분사 구절을 직역하면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입니다.

그 동사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동사를 사용해 바울은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수행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수행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늘 자신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선'에 대해 '칼로스'(kalo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이 구절 서두에 사용된 '악'을 의미하는 '카코스'(kakos)와 운이 맞습니다. 성경에서 '칼로스'는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여기서도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칼로스'는 일차적으로 목적과 일치한다는 의미의 아름다움 혹은 고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고 유용하다는 의미의 이런 기본적 어의를 기초로 해서 도덕적 선이나 칭찬을 받을 만한 고귀함과 같은 개념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번역들이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 보기에 고귀한 일에 대해 생각하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당신은 오직 지고의 이상들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는 번역도 있으며 "당신의 공적 행동이 비난받을 여지가 없게 하라'는 번역도 있습니다.

어떤 번역이건 이 구절 역시 버거운 명령입니다. 죄 된 본성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도전입니다. 우리는 늘 고귀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경험하는 그 기쁨만이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고, 모든 일을 하기에 앞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계획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빌 3:3)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전체에 걸쳐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왔습니다. 어떻게 서로의 은사를 지지해 주며, 지체가 돼주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범위를 확장시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사는 방식대로 살라고 촉구합니다.

오래 전에 빌리 그래함 목사의 사역을 좋게 보지 않던 몇몇 신문기자들이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자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의 삶을 면면히 관찰했고, 그와 그의 동료들을 인터뷰했으며, 과거사를 꼼꼼히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는 그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경건했는지 결국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겐 사람들 앞에서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로마서 12장의 권고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공동체 외부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러한 책임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공동체 안에서 행하는 사랑과 섬김과 겸손의 태도와 행위는, 결국 세상 사람들을 향해 선하고 칭찬받을 만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요즈음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세상에 보여 주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겠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살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다짐을 해봅니다. 이 다짐이 우리 모두의 다짐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