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동네가 시끄러웠습니다. 내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손에 주먹만한 돌과 도끼를 든 채 집 주위로 몰려와 당장 마을을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지금 당장 이 마을을 떠나라! 우리는 예수쟁이를 원하지 않는다! 당장 꺼져라!” 가족들과 함께 뒷문을 빠져나와 친구집으로 잠시 피신했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사람들이 물러간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경찰까지 함께 왔습니다. 사람들의 위협에 도움을 주어야 할 경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당장 교회 활동을 중단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이곳을 떠나십시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불교를 국교로 정한 인도 남부에 있는 작은 섬 나라인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수도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Sri Jayawardenepura Kotte)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55마일 지점에 위치한 케갈(Kegalle)이라는 곳에서 목회하시던 니말(Nimal) 목사님은 교회 활동을 중단하라는 경찰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듯 갑자기 발생한 이 일을 통해 니말 목사님은 오히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더 분명해졌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고, 살아남기 위해 성도들과 더욱 연합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니말 목사님의 말입니다: “이곳이 주님께서 저에게 사역하라고 하신 곳입니다. 제가 케갈 지방으로 간 것은 주님께서 저를 그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가기 6개월 전 주님께서는 친히 제가 그곳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그 땅을 보여 주셨습니다. 처음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 주님은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비록 시련과 핍박 때문에 콜롬보(Colombo) 지방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도시)이나 다른 곳에서 사역을 하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받지만, 제 심장이 느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 장소는 바로 이곳 케갈입니다. 저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을 더 분명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Opendoors」소식지, 2016년 11월호 ).

시편에 기록된 대부분의 내용은 고난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신약성경에 포함된 많은 서신서들은 감옥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존 번연의「천로역정」역시 감옥에서 기술되었습니다. 간호사이기 이전에 본인이 50년간의 만년 환자였던 나이팅게일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병원 개혁을 건의하고 간호 교육을 체계화할 수 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평생 질병의 고통 속에 살았던 파스퇴르는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업적을 일구어 냈습니다. 5분 이상 일할 수 없었던 사람, 특히 몇 개의 큰 글자만 겨우 쓸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을 가졌던 프란시스 파커만은 자신의 그 약함 때문에 더 위대한 미국의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You Gotta Keep Dancin'」Tim Hansel ).

19세기 영국의 목회자요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전의 침실 벽에는 다음의 내용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는다는 것은 궁전이 아니라 용광로에서 선택받는 것이며, 그 용광로에서 아름다움은 손상되고, 유행은 파괴되며, 강함은 녹아지고, 영광은 소멸된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영원한 사랑의 비밀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선택이 선포된다"(「Wycliffe Handbook of Preaching and Preachers」Warren W. Wiersbe ).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아무런 고난도 없습니까? 고난을 생각하는 것조차 싫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고난 없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성경도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삶을 사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를 향해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과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을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일까요? 고난이 우리를 진짜 그리스도인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리랑카의 니말 목사님처럼 고난이 주님의 뜻을 더 분명히 알게 하고, 성경의 많은 인물들과 믿음의 선조들처럼 고난을 통해 주옥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선택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어떤 고난을 만나더라도 고난이 주는 유익을 생각하며, 오히려 그 고난에 감사하며, 고난을 거뜬히 이기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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