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57

오늘은 성령의 열매(갈 5:22-23) 가운데 “양선”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양선을 새번역 성경은 “선함”이라고 번역하고, 영어 성경은 “Goodness”라고 번역합니다. 곧 양선은 선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미국 복음주의 진영의 거장인 달라스 윌라드는 한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대답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인생이 최고의 인생입니다.

노리치의 줄리안이라는 여성 영성가는 이러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십시오. 저에게는 당신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만일 제가 당신 아닌 어떤 것을 구한다면 저는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직 당신 안에 있을 때, 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내가 삶의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싶은데, 내 삶에는 고통만이 가득하고 도무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가장 큰,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8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자,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나의 죄를 대신 지는 희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사건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최고의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나도 선하게 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해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가 이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비유에는 포도원 주인이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일꾼들을 불러오는데, 아침 9시에 들어온 일꾼이 있고, 낮 12시에 들어온 일꾼이 있고, 오후 3시에 들어온 일꾼도 있고, 오후 5시에 들어온 일꾼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정산할 때에 주인은 모든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줍니다. 그러자 일찍 온 사람들이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화를 냅니다. 아침 9시부터 일을 한 사람은 당연히 화가 나겠지요. 그러나 주인은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모든 일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돌려 보냅니다.

이 말씀을 올바르게 묵상하는 방법은 내가 바로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자신이 아침 일찍 들어온 일꾼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품삯 정산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아침 9시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너무나 당연히 내가 아침 9시에 들어온 사람처럼 본문을 읽지만, 이 말씀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깨닫는 것은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만나 주시고, 오후 4시까지 하나님을 모르던 그때에도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도무지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인데 겨우 턱걸이로 오후 5시에 구원 받은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면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는 이것입니다. 양선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고, 나도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시니, 나도 당신을 선하게 대합니다.

걸레질하는 예수

채희동 목사라는 분은 이러한 삶을 살고자 애썼던 분입니다. 채희동 목사가 쓴 『걸레질 하는 예수』라는 책을 보면 걸레와 대화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임신 두 달째로 접어들어서 입덧이 심한 아내를 위해서 청소도 하고, 밥도 하면서 채희동 목사는 걸레와 친해졌다고 합니다. 어느 날 걸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걸레야, 넌 참 대단하다? 넌 어떻게 네 몸으로 그렇게 더러운 곳을 구석구석 닦을 수 있니? 나는 더러운 곳이나 오물이 많아 냄새나는 곳이면 코를 막고 돌아서는데, 너는 참 대단하다.” 그러자 걸레가 대답합니다. “뭐, 그래도 난 기뻐. 내 몸이 지나간 곳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윤기가 나고 아름다워지잖아. 그래서 난 걸레로 사는 게 보람이 있어. 너도 한 번 나처럼 살아 봐.” “뭐, 나보고 더러운 걸레인 너처럼 살아 보라고?” “그래, 네 스승 예수도 그렇게 살았잖아.” 여기에서 채희동 목사는 대답을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더러운 걸레처럼 살았다고?” 그러자 걸레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난 누군가가 나를 움직여야 걸레가 될 수 있어. 어느 누구도 내 몸을 움직여 주지 않으면 세상을 닦는 걸레가 될 수 없는 거지. 내가 세상을 닦는 걸레가 되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바로 너야.”

채희동 목사는 걸레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선함을 경험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세상을 닦는 걸레의 삶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 주신 선함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선하셨던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이런 삶을 살고자 했던 채희동 목사는 2004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시골에서 목회하고 있던 채희동 목사는 다른 교회에서 찬송가 대회 심사를 봐달라는 요청을 받고 승합차를 끌고 마을 앞 신호등 앞에 서 있다가 달려오던 유조차에 받혀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채희동 목사는 그 유조차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마을은 강가에 있었는데, 마을이 강가의 둑보다 낮았습니다. 그날 대형 유조차의 운전사가 졸면서 둑길을 과속으로 달렸는데, 만일 이 유조차가 둑길 아래의 마을을 덮쳐 폭파되었다면 대형 참사가 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앞 횡단보도에서 승합차를 타고 서있던 채희동 목사가 돌진하던 유조차를 온전히 홀로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며 살고자 했던 채희동 목사는 그렇게 이 땅에서의 삶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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