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로마서 12:20).

개신교 은총의 교리와 배타성

한국교회 교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타종교나 타 이념에 대해 전투적이고 적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 개신교 교인들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타종교나 다른 사상에 대해 적대감을 공공연히 표출해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과연 성경적이고 옳은 사고방식일까요? 또 한국의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국 개신교 교인들이 거의 맹신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칼뱅주의 은총의 교리가 낳은 결과입니다. 칼뱅주의의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강조는 역으로 우리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이분법적인 생각을 양산해 냅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구분은 구원 받은 우리와 구원받지 못한 타자를 구분합니다. 또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어 철저히 개인화됩니다. 따라서 종교 간의 평화나 평화적 민족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 그리고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같은 일들은 신앙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는 영역으로 비껴나게 됩니다.

이러한 기독교 이해는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대단히 심각한 현상들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여성에 대한 차별, 자연에 대한 무차별한 착취,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시각, 사회적 약자나 노숙자들에 대한 책임 추구 등 전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 부합할 수 없는 역기능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여성 신학자 로즈마리 튜터의 이야기는 그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칼뱅주의가 중세 기독교의 성례전적인 우주를 해체시킨 반면 중세 기독교의 악마적 우주관을 유지하고 강화시켰다. 타락한 세계, 특별히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과 칼뱅주의 교회 밖에 있는 인간 집단들을 사탄의 지배 하에 있다고 보았다. 개종하지 않은 인디언과 아프리카인들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을 포함한 '이교적인' 모든 것은 악마적 세력의 장소였다. (...) 개신교도들 중에서 칼뱅주의자들이 영국, 스코틀랜드, 뉴잉글랜드에서 마녀사냥의 선봉에 섰다. 그들은 가부장적 가족을 교회와 국가의 기본 제도로 보는 새로운 이해를 형성시켰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와 교회들의 행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에 근거한 은총론이 만들어내는 이원론적인 사고는 한국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숙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매 주일 대표기도에는 북한이 빨리 패망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하늘을 찌르고, 동양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에 어서 속히 교회가 재건되도록 해달라는 호소가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그들과는 화해할 수 없는, 정복되어야 할 적이요, 섬멸되어야 할 악의 세력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의 주제와는 완전히 반대인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개신교 교인의 그것도 오래된 중진 이상의 개신교 교인들의 특성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끊임없는 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시대와 상황의 산물입니다. 그 말은 교리와 신학은 언제든 새로운 상황 속에서 다시 되새겨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비폭력 저항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의해 황제의 신학이 되어버린 기독교 신학은 제국의 질서와 체제 유지를 위해 전쟁을 정당화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정의요 성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희년의 정신마저 부인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은총의 교리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게 하기보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가리는 '가인의 후예'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위성의 발사 각도가 조금만 틀려도 수만 미터 상공에 이르면 전혀 엉뚱한 위치에 도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그와 똑같이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시 처음의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2:20은 귀중한 권면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20절은 17절~19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수들에게 사랑과 친절로 대응하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17) 그것은 평화를 짓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자(18) 보복을 피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19) 바울은 이제 잠언 25장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세 가지 권고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아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인용된 이 구절은 해석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잠언서가 솔로몬 왕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지혜문학 운동에서 유래되었고, 다른 이방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여러 가지 경구들도 한 곳에 모아놓은 특이한 모음집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경 구절이나 외경에 등장하는 '숯불'은 본래 심판을 가리킵니다.(창 19:24, 레 10:2, 시 11:6, 겔 21:31, 에드하(위경) 16:53) 그런데 심판이란 뜻은 본문의 취지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1) 수치심을 느끼게 하라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그 단어를 '수치심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는'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저도 이제까지 그런 해석을 들어왔고 그런 식으로 본문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수의 수치심을 강조하는 해석이 과연 옳은 것이냐에 대한 의구심이 늘 있었습니다.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할 의도로 숯불을 쌓기란 사실상 보복과 다를 바 없는 행동입니다. 원수들에게 고통스런 감정이 들게 하려고 비범한 선을 행한다면, 그런 행동은 평화를 추구하는 원칙에 위배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런 선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서 12장 전체의 주제처럼 악에 대해 어떻게 친절로 대응할 것인지를 보여 주려고 잠언을 인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2)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라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두 번째 해석은 특별한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레이 스테드만은 숯불이 과거에 불을 붙이는 수단이었으며 셈족 문화권에서는 그릇에 물건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녔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잠언 25장의 이미지가 이런 친절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원수들의 집에 불이 꺼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기 집 숯불을 그릇에 담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서 다시 불을 지필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주는 해석입니다.

3) 회개에 이르게 하라(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라)
난해한 이 구절에 대해 피터 코터렐과 맥스 터너는 훨씬 나은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잠언 25: 21-22은 문맥상 23절과 같이 읽어야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주시리라”(잠언 21-22).

사도 바울이 인용한 부분은 여기까지 입니다. 그러나 23절을 같이 읽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북풍이 비를 일으킴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23).

주석가들은 23절에 대해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북풍은 비를 가져오는 바람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북풍은 비를 가져오는 바람이었으며, 이 사실을 인식한 클라센은 앞 구절의 은유적 기원을 이집트 문화에서 찾도록 해주었습니다. 코터렐과 터너는 연구 결과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클라센은 그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F. L. 그리피스가 처음 출판한 이집트 문서 『멤피스의 대제사장 이야기』에 대해 언급한다. 그 문서를 보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이 자기 머리에 숯불이 담긴 토기를 인 채 자신에게 해를 입은 사람을 찾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그렇다면 잠언에 사용된 은유의 의미는 명백해진다. 원수에게 하는 너그러운 행동은 원수가 회개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라는 의미다. 만일 바울도 이 은유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원수를 위협하는 대신 용서를 베푼다면 그 원수를 마침내 회개하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행동은 그 원수의 머리에 직접 숯불이 담긴 그릇을 얹어 주고 그를 회개의 길로 떠나보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잠언이 이방 문화권에게서 영향 받은 여러 가지 경구들을 모아 놓은 특이한 모음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 해석이 합리적이고 로마서 12장의 전체 맥락과 어우러지는 해답인 듯합니다. 원수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는 식의 일반적 해석은 어딘가 보복의 냄새가 나며 기쁨의 정신과 모순됩니다. 그러나 클라센이 말하는 의미로 은유를 이해한다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베푸는 친절은 원수를 회개의 길로 이끌어 준다는 뜻이 됩니다.

본문을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바울은 원수들의 필요에 관해 두 가지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굶주리고 있거나 목말라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필요에 구체적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실제적인 방식으로 원수들을 섬기라는 현자의(잠언서 저자)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어떤 필요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잠언 25장의 히브리어 본문의 명령들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있게 해주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원수가 굶주리거나 목말라할 때,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워 주는 것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세를 위한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적용을 요구합니다.

바울은 잠언서의 이 가르침을 헬라어 본문에 인용하면서 현재진행 명령형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원수가 굶주리거나 목말라 하는 한 계속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잠언에 등장하는 은유적 표현에서 한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잠언 25장 22절은 "여호와께서 네게 상을 주시리라"라고 끝나는데, 그 구절의 히브리어 동사는 히브리 명사 '샬롬'과 관련이 있습니다. 원수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으로 반응할 때 여호와께서 우리를 더욱 온전하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보복은 우리 자신이나 공동체를 온전함으로 이끌어주지 못합니다. 보복을 포기하고 원수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 노력할 때, 여호와께서는 '샬롬'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 따르미(Follower of Jesus)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삶을 닮지 않았다. 교회는 종종 예수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신학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기독론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자신의 중심적 메시지로부터 '이혼' 당한 슬픈 예수를 본다. 물론 하나님 나라가 떨어져 나간 예수의 빈 자리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 문화적 우월감, 종교적 완고함, 기존 질서에의 순응, 그리고 도피적 구원관이 메운다. 이제 다시금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가 믿고 살았던 것을 믿을 때가 되었다." (장윤재, 『세계화 시대의 기독교 신학』 p.275)

바울이 권면하는 내용들은 그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 때 그것은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온전히 죽은, 그래서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이름뿐인 주이거나 이권을 합리화하는 제의적 상징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헌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따르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원수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그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며, 평화를 짓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며, 온전한 샬롬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