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자유함에 대하여…

400년 전에는 지구가 덜 돌았는지,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의 머리 역시 덜 돌았는지, 그의 『영신수련』에는 영적 자유함에 대한 의미가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다.

“영적인 자유함은 애착 혹은 집착으로 인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불편심(不偏心: indifference), 즉 ‘영적인 무관심 혹은 초연’의 상태를 말한다.”

즉, 집착으로 인해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마음과 그리스도 외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무관심과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의지. 이런 영적인 자유와 하나님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거룩한 깍지를 낄 때가 바로 분별을 할 때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21번에서, “영신수련은 자아의 정복과 자신의 삶의 규칙을 갖기 위함이며, 어떤 형태의 부적절한 집착과 그래서 영적인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결정도 내려서는 안 된다’ 고 조언한다.

어려운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제외한 창조물, 그것이 재산이든 명예든 섹스든 자식이든 질병이든 뭐든 간에, 정도를 벗어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혹은 포기한) 상태가 되어야만 우리는 내적으로, 영적으로 자유를 얻게 되고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게 된다. 여전히 마음 속에 선호하는 것이 있어서 은근히 혹은 공공연히 하나님이 그것으로 결정해 주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원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우리가 지금 겸손히 배워나가고자 하는 분별의 과정과는 맞지 않는다. 최소한 크리스천의 분별 학교에 등록해 신앙의 성숙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자라면, 선호하거나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우리의 신앙고백과 같이 ‘당신의 뜻이 이뤄지소서’라고 먼저 기도해야 한다. 아니면 이러한 마음이 생기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먼저 구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 동기 점검 필요해!

그렇다고 원하는 것을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도 움직여 억울한 과부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분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약속하신 너그러운 하나님이시다. 잊지 말 것은, 주님이 알려 주신 기도문에서조차 우리가 물질적으로 원하는 바를 청원하는 것은 오직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이다(우리는 일용할 양식,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부르짖었던 하늘의 만나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도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이 뜻이 이뤄지도록 간구한 다음에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의 몸을 건사하기 위한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기도가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와 나라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그 소원이나 그 기도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의 집(교회)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동기 점검(혹은 양심 성찰)을 먼저 해보아야 한다. ‘내가 지금 80평 아파트로 옮기고 싶은 것’, ‘굳이 저 대학교를 가기 위해 재수를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언제까지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주면 감사하고 안 주면 실망하고… 하지만 어떤 경우이건 잊지 말 것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한 기도를 하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성숙한 기도를 하든, 하나님은 결국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거나,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응답의 시간이 또한 우리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때 수많은 유럽인들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 땅을 밟았던 적이 있다. 이들에게 비춰진 자유의 여신상은 말 그대로 자유의 상징이었고 기회의 상징이었다.

미국은 결국 자유의 땅이 되었다. 온갖 ‘~~주의’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슈퍼마켓에 빼곡하게 진열된 상품들처럼 미국은 많이, 아니 넘치도록 갖고 있고, 셀 수 없는 기회들이 제공되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다. 미국이 온 세상에 알려준 자유는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자유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소비지향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 누구나 선택의 기회를 최대화하려고, 그래서 더 높이 올라가려고 노력한다.

이때 적절한 명언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일것이다. 대신 실패하면, 더 많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 억울함이나 분노와 함께 살게 되며, 종국에는 자포자기하게 된다. 외적으로는 고삐 풀린 자유를 누리되 영적으로는 포로와도 같은 삶을 사는 결과를 보게 된다.

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거나, 포기하거나, 우리 자신의 제약과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자신(정욕)이 죽어야 다시 살게 되는 그런 부활적, 세례적, 내적인 자유다. 이런 자유는 결코 소비적이거나 방임적일 수 없으며, 도리어 구속적이다. 우리의 구원, 삶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듯이(“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느니라”롬 3:23-24), 우리 자신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구속시킴으로써(“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얻게 되는 자유이다.

이런 구속적 자유는 ‘우리의 뜻에 상관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동의하고 수용하는 데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어느 자유를 원하는가? 외적으로는 자유로우나 내적으로는 포로와 같은 인위적이고 소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유인가? 아니면 외적으로는 불편하나 내적으로는 구속의 기쁨을 주고 하나님의 자비를 증가시켜 주는 그런 자유인가?

사도 바울의 말씀이 이때 적절하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 5:13, 새번역)

이어지는 1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함으로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할 수도 있고, 반대로 서로 물고 먹는 일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유함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 사용되면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탄에게 종 노릇 하는 일이 되고 만다, 피차 망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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