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대통령 탄핵안을 두고 태극기와 촛불의 대결이 한창이다. 양측 모두 조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의 시위를 주도하고 있지만, 이면의 주장은‘자유’ 아니면 ‘적화’라는 국가적 운명이 걸려 있어 우려가 된다.

온세상이 다 알 듯, 북한은 굶주림과 헐벗음에 시달리면서 대다수 주민들이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함에도, 북한을 고무하고 찬양하는 종북자들이 남한에 수십만 명이나 된다는 주장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먹을 것이 없어 300만 명이나 굶어 죽었다는 북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만 가려 해도 통행증을 발급 받아야 갈 수 있다는 사회, 독재로 인해 온갖 노동과 감시에 시달리며 먹을 것이 없어 일부 주민들은 잡곡이나 풀뿌리 등으로 연명해야 하는 극심한 빈곤. 이러한 북한의 삶이 무엇이 좋아서 종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50년대와 60년대를 경험한 우리는 굶주림과 헐벗음이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것인지를 안다. 식량이 없어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고 몇일을 굶어야 했던 그때, 땔감이 없어 산과 들을 다니며 나무를 베었기에 산마다 민둥산이 되었고, 배고픔에 못 이겨 산열매를 찾다가 자신도 모르게 “저주 받은 땅이라 열매도 하나 없는가”라며 탄식했고, 입을 옷이 없어 다 낡은 군복을 검정색으로 물들여 사시사철 입고 대학을 다녀야 했던 그때,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시간이 돈’이라는 말은 한낱 꿈일 뿐, 특수층을 제외하고는 일정한 수입도 없이 답답한 삶을 살았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도 그때 우리에겐 자유가 있었다.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데 간섭이나 제한을 받지 않았고, 직장을 찾아 아무 도시, 아무 지역을 가도 상관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상범이나 정치범으로 감옥에 간 사람들조차, 탈북자들이 전하는 북한의 수용소처럼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다가 죽어서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던 한국이 지금은 먹을 것이 남아 돌고, 입을 것이 풍부하여 헌옷 처리로 골치를 앓는가 하면,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고, 곳곳에 아름다운 환경 시설을 만들어 세계 상위권에 발돋움한 경제 부국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각 도시마다 한국 기업들이 만들어낸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각 점포마다 한국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국위를 떨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지켜 보면서, 비록 대한민국을 떠나 살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으로서의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모자라길래 종북을 도모하며 적화통일을 하지 못해 안달을 하는가 말이다. 만일 종북 세력이 한국의 정권을 탈취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뻔하지 아니한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이들이 수두룩하고, 왕래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감시와 간섭에 시달리는 북한 실정이 그토록 부럽고 좋다는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세뇌를 받았기에 머리가 그토록 돌았을까? 요즈음 한국 언론들만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좌경이 된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대통령 대행자를 불러 놓고 호통을 치며“총리도 촛불에 타 죽고 싶냐?”며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또한 검찰의 엉터리 수사는 더욱 더 분을 치솟게 하고, 정치적 배신자들을 볼 때 처참하다 못해 좌괴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종북자들이 바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연방통일을 하여 김정은을 대통령으로 세워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이 그들의 바람인가? 아니면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 처참하게 굶어 죽은 그것이 부러워 종북을 하자는 말인가? 한 시민이 “공산주의는 기생충”이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아무 노력 없이 남이 차려 놓은 밥상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려는, 기생충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정권을 넘기고 그 밑에서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것이 그들의 꿈과 소원일진대,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 숫자가 얼마가 되었든 북송선을 태워 영구히 사라지도록 함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이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