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분인 김세윤 박사의 인터뷰 기사를 봤습니다. 기자가 타이틀을 잘 뽑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해도 아프고 가난한 건 왜일까?”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첫 문단에서 기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몇 년 째 교회에 나가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는 건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걸까? 예수를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해지는 ‘상’을 받는 것일까?”

김세윤 박사는 이 질문에 대해 간략하게 대답합니다. 신앙과 복, 죄와 고난 등을 인과관계(因果關係)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앞에 두고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를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에게 다가온 불행과 행복을 그 사람의 삶에 있었던 어떤 행위의 결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적인 사고로는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고, 우리의 신앙은 그 모든 일들의 원인을 설명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성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은 이미 이 세상을 통해 하나님의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주에 저희 교회에서는 예음이라는 두 돌 된 아이의 생일 잔치가 있었습니다. 생일도 되고 했으니 엄마 아빠가 예음이를 앞에 두고 탄생의 비밀을 설명한다고 합시다. “엄마, 아빠가 어떻게 만나게 되어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터서 어떻게 결혼을 했고, 그래서 네가 태어난 거란다....” 예음이는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부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예음이가 엄마, 아빠를 의심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받고 알고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두 살 예음이와 부모의 차이, 그리고 우리들과 하나님의 차이 중 어느 차이가 더 클까요? 예음이가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 빠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빠를까요? 저는 예음이에게 한 표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식보다는 믿음이요, 이해보다는 순종입니다. 인간의 이성의 필요성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꾸만 설명하고 이해하려 하다 보니 억지로 말씀을 해석하고 풀어가는 어리석음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오마이갓’이라는 종교 대담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한국의 각 종교를 대표하는 성직자들이 나와 토론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불교와 원불교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인생 문제에 대해 가장 명쾌하고 재미있는 설명을 하는 종교가 무엇이었을 것 같습니까? 바로 불교였습니다. 아마 욥기의 문제를 불교적으로 풀어보라고 한다면 답은 아주 심플할 것입니다. 첫째, 인생 자체가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생에서는 고난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둘째, 그런데도 여전히 의문이 있다면 불교의 기본 철학인 인과응보 사상으로 설명합니다. 전생에 업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욥이 아무리 자신의 의를 주장해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의 죄와 업이 있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셋째, 그래도 또 질문을 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저렇게 악한데도 잘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대답은 더 심플합니다. 다음 생이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지금 생에서 악을 행하고 부와 쾌락을 누리는 사람은 다음 생애에서는 짐승으로, 벌레로, 혹은 아주 비천한 사람으로 태어나 이생의 업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패널들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웃으면서 척척 받아넘기는 스님의 논리에 재미와 감탄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슬픔 많은 인생을 삽니다. 우리의 슬픔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에 감사합니다. 인생을 향한 참된 위로와 감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심에 답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의 품에서 그 손을 붙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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