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해야 하겠는지라"(요한복음 4:1-4).

예수님과 세례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1-2절은 무심히 지나치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셨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1-2절 또한 그러합니다. 1-2절은 3절과 4절을 위해 꼭 필요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유대 지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소식을 듣고 위협을 느껴 어떻게든 막으려 했고 예수님은 아직 때가 아님을 아셨기에 충돌을 피해 갈릴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을 지지해서 요한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갖게 된 예수님을 박해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 운동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자 그것을 경계하고 제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어 요한의 세례 운동의 근거가 어디인가를 물었습니다(1:19-20).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자, 그를 세례 요한보다 더 위험한 인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반대할 명목을 찾지 못했지만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게 된 예수님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낌새를 알아채시고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라는 내용이 괄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괄호의 의미는 보충 설명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에게 시킨 것일 수도 있고, 제자들 스스로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직접 세례를 주시지 않았을까요? 또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기 원하지 않으셨다면 왜 제자들이 세례를 주는 것을 만류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먼저 세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세례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영적 예식이 세례라고 일깨워 줍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건넜던 홍해 사건에 비유하여 세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진을 쳤을 때입니다. 마음이 돌변한 애굽의 바로 왕이 온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그 무서운 애굽의 전차부대가 쫓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죽은 목숨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자 홍해가 다시 원래대로 합쳐졌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되돌아갈 길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가 옛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좇아 주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서 진리의 길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참된 세례의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 1세대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갈 길은 없어졌지만, 그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애굽으로 향한 대로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했고, 그 결과 진리의 길을 선택하기보다 자기 욕망에 집착했던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세례'라는 엄청난 은총을 얻고서도 그것을 외적 자랑거리로 삼았을 뿐, 하나님 말씀의 적용과 바른 선택을 위한 영적 세례가 되도록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비극은 바로 세례에 대한 이해가 사라진 데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애굽에서의 삶의 방식, 즉 세상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며 공표입니다. 이제부터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것을 만 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히 이해하고 그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좀 더 낫겠다 싶은 정도라면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기록대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한 이후에도 기쁨이 넘치는가를 냉철하게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망설여지고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면 세례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례 이야기는 되새겨볼 만합니다. 그는 거의 300년 동안 이어졌던 박해 시대를 종식하고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과 동방교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의 치하에서 수만 명의 군인들이 합동으로 세례를 받기도 하였지만 막상 자신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권력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두 번째 이유는 가난하게 살기가 싫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를 받으면 권력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시점이 죽음 이후였는지 이전이었는지 의식이 또렷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세례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초코파이를 먹기 위해 세례 받는 군인도 있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도 기도하기 위해서라든지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또는 만사형통한다거나 남들 다 믿으니까 등등의 이유로 심지어는 사업장 근처의 큰 교회를 다니면 영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세례를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시지 않은 이유

1) 기적 신앙
예수님께 직접 세례를 받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베푼 이들은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이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을 통해서만 세례를 베풀었을 뿐 직접 세례를 주신 일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시다가 이 성경 구절의 시점에서부터 제자들로 하여금 세례를 주게 하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세례를 주셨는가 아닌가, 언제부터 세례를 주시지 않았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중요한 질문은 왜 주님께서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으셨나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의 니고데모처럼 단지 예수님께서 베푸신 표적에 사로잡혀 예수님께로 몰려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자들 역시 몰려온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제자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2:11). 제자들의 이런 믿음은 성숙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보고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초보적 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월절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한 표적을 보고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믿지 않으신 것은 그들의 믿음이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적(표적)을 보고 믿는 초보적 신앙은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그 다음날도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었던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

신앙에 진정성이 없다는 지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시자 그들 대다수는 "이 사람이 어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라고 반문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66)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찬이 의미하고 상징하는 바입니다.

2) 십자가
예수님께서 세례를 직접 주시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아직 예수님의 여정을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가 제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난 이후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자신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침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자 비로소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하고 주님을 만류하였습니다. 주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각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해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단호하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무너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분의 능력 또한 의심하지 않았지만 십자가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에 그분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제자들은 주님 곁을 떠나 제각기 살 길을 찾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충성심 강했던 베드로는 멀리 도망가지 않고 체포되신 주님 곁을 맴돌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협을 받게 되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이 밝아오고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하고, 주님에게 용서와 사명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죽음을 불사하는 제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제자들도 주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몰려온 사람들에게 직접 세례를 주시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말했어도 제자들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떠났을 것입니다. 만일 그 시점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면 큰 혼란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기를 치셨다고 난동을 부렸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받는 세례는 무의미한 세례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고 따르는 예수님은 성경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세례 받는 이들 역시 당신처럼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들은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 받은 자의 삶

세례가 참된 것이었다면 세례 이후의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참석하느냐, 예배를 드리느냐, 헌금을 열심히 하느냐 하는 외형적인 변화나 참여가 아니라 말씀에 따라 살고 예수님처럼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를 보이라"(빌 3:17). 본받을 사람은 사도 바울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도 본이 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하는 말을 실천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요? 개신교 교인들이 '말 잘 하는' 성도들이 된 것은 그들의 지도자들과 앞 세대들이 말만 잘 하는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요, 부모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목사가 설교 시간에만 옳은 말을 하기 때문이요, 교회 안에서만 옳게 사는 척 하고, 밖에 나가 생활할 때에는 말한 그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찾아와 세례 받기 원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직접 세례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 세례 받은 자로서 바른 삶을 사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의 삶에 적용하고, 그 말씀에 따라 바른 선택을 행하는 세례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런 세례의 삶을 살아 사도 바울과 그를 본받았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그 핵심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을 본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아의 죽음을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그런 각오와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세례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말만 믿고 세례를 주고받는 일이 계속 된다면 기독교는 종교 놀음에 천착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세례를 묵인하신 것은 그들이 주님 곁에 머물면서 주님에 대해 더 알고 배우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분이 주신 새로운 생명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만일 새 생명이 없다면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새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의 역사에 따라 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세례 받은 자로서의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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