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자유함의 원천

그렇다면 영적 자유함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의 자구적인 노력이 제한적이어서 그 어떤 물리적인 프로그램으로도 얻을 수 없다면 어디서 영적 자유함을 추구해야 하는가? 한 마디로, 영적 자유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데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은혜의 산물이다.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지도의 핵심이다.

그는 거창한 영적 분별의 원칙들을 나열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영적 분별의 기술자들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다.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실존적인 체험을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로마서 5:8 말씀이 우리의 죄인된 마음에 비수처럼 꽂힐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은(만이) 모든 지식을 초월한다’(엡 3:19)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눈물 어린 첫사랑의 고백이 없다면, 그래서 주님과의 사랑이 지속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사랑의 고백이 있기까지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가 병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기”(요 14:26)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도록 인도하며, 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도록 격려한다. 서양 찬송가 가사처럼, ‘사랑 안에 거할 때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Abiding in Love, Abounding in Grace)’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현안의 문제들이 아무리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해도, 그것을 인내하고 무관심하거나 초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안도감과 보호의식 그리고 구원의 확신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확신은, ‘지금은 당장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다 얻을 것이다’라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수태고지에 대해서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한 성모 마리아의 ‘거룩한 무관심’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세례 요한의 고백을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세상의 것들로부터 무관심해질 수 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는 욥의 세상 것들에 대한 무관심의 표현이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을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이 확신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실 거라는 흔들림이 없는 믿음)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에게조차 집착하지 않는 영적인 무관심을 얻었고, 극진히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과 동일한 사랑의 확신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여전히 이런 확신이 없다면 기도하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 그래서 적극적인 무관심의 은혜를 입어라!),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그것이 명예이건 재산이건 가족이건 그 무엇이건 간에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리기로 작정하게 될 것이다.

기억하는가? 우리가 세상적인 문제로 씨름하고 괴로워할 때, 그래서 시편 119편과 같이 우리의 눈마저 쇠하여지고 피곤하고 지쳐 더 이상 빛이 보이지 않을 때, 주님은 늘 이렇게 묻지 않으셨던가? 부활하신 후에 만난 베드로에게 예수님깨서 물었던 바로 그 질문과 다르지 않다.“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서 “그 문제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 사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너는 나만 사랑하면 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던가? 지금 현재의 상황에 매여 있는가? 불안한가? 초조한가? 두려운가? 그래서 올바른 분별을 하기 힘든가? 하나님께 사랑의 고백을 하라! 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경험하지 않는 한, 영적인 자유도 없고 올바른 분별도 없다.

부적절한 집착과 적절한 집착의 차이

한 가지 선을 그을 것은, 우리의 경건한 삶이나 일상을 해치지 않는 수준의 ‘적절한 집착’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집착이란 단어는 집중이나 관심이나 열정이나 갈망 등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했을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기본적인 필요와 하나님 나라와 이웃의 구제를 위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중보하는 행위는 극히 자연스러운 신앙적 탄원이지 결코 집착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질서한 집착과 적절한 집중 사이에 균형을 갖도록 기도를 드려야 한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붙잡을 것은 용감하게 붙잡기 위한 분별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오직 주께로” 향한 우리들의 관심과 열망과 사랑의 표현이어야 하며, 이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세상의 문제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성령의 부으심일 것이다. 이러할 때 우리는 드디어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문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 손에 올려지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 처리되고 해결된다.

이런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이미 자유함을 얻은 우리는 그 결과에, 설혹 그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불행, 혹은 극단적인 죽음까지 부여한다 해도 무조건 순복하게 된다. 우리의 영적인 자유함이 헌신적인 의지로 승화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 것에 대해 감사와 찬양과 존귀를 올려드린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문제가 우리의 능력 밖에서 해결된다는, 그리고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들이 주권을 타자인 하나님께 넘겨드리고 그 분별의 결과는 대신 짊어진다는,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학적 신비는, 우리들의 영적 자유함과 그로 인한 거룩한 의지나 의무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려운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 나의 모든 생각까지 내려놓는다는 것, 그리고 주님이 주신 고통까지 부둥켜안고 간다는 것,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쉬운가? 어렵고도 어렵다. 이 어려운 길의 시작이 곧 우리들이 영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시작이다. 정작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를 결정하고 분별하는 일은 도리어 쉬울 수 있다. 지구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분별의 과정에서 좌절하고 실패를 맛보는 것은 바로 그 선택의 최종 순간에 실수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자유함 없이 이런 분별의 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엉킨 실타래를 끊어내기 전까지는 원상태로 돌리기가 어려운 것처럼 분별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자유함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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