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립학교에서 주기도를 할 수 없고 십계명을 가르칠 수 없게 되자, 미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새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고, 동성애 등에 대한 설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뉴스가 나오자, 다행이며 마땅하다는 신자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무슬림들의 입국을 제한하는 정책에 속이 시원하다는 소리도 들리고 이제 미국이 기독교국가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기대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정말 미국땅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둘로 나뉩니다.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 경에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남유다 또한 B.C. 586년 경에 바벨론에 의해 무너집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앗수르와 바벨론의 식민 정책은 강압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도층을 포로로 잡아가고 이민족을 강제 이주시켜 문화와 종교를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국들이 식민지를 지배할 때 쓰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뒤를 이어 중동의 패권을 차지한 페르시아는 좀 달랐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고, 성전 재건 요청도 받아들였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준 것입니다. 땅과 문화와 종교를 빼앗긴 채로 지냈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고레스는 그야말로 여호와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사 45:1)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목자(사 44:28)였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운동과 유대교 부흥운동은 이런 배경 가운데서 진행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뒤를 이어 제국의 주인공이 된 알렉산더와 헬라의 계승자들 역시 관용 정책을 택했습니다. 현지의 문화와 종교를 그들의 통치에 위협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장해 주었습니다. 셀류키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처럼 성전 제사를 금지시키고 유대교를 탄압한 왕도 있었지만, 큰 흐름은 관용 정책이었습니다. 로마제국 역시 종교세력이 민란을 일으켜 독립투쟁의 주체가 되지 않는 한, 각국의 민족의 종교를 용인해 주었습니다. 유대교는 로마 제국 내에서 공인된 여러 종교 중 하나였습니다. 때문에 디아스포라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지에 회당을 짓고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개종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또한 처음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되어 예배와 전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은 네로 황제때부터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시지요. 기독교 입장에서 이런 환경은 하나님의 은혜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를 박해한 세력은 로마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교였습니다.
기독교는 복음 자체가 지닌 탁월한 경쟁력으로 타종교의 성장세를 압도하며 로마제국 내에 퍼져갔습니다. 그것은 섬김과 희생, 생명과 사랑의 정신과 윤리였습니다. 이것은 제국의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들을 진리로 인도했습니다. 기독교가 변질 또는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제국의 종교로 법적인 보호를 받으면서부터였습니다. 행정적, 법적 지원과 보호 속에서 타종교를 압도하는 정책에 기독교인들은 익숙해졌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감사하며 찬양했지요.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의 꿈은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과 열방이 그분 앞에 나와 엎드려 예배하고 그분의 뜻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제국의 방식이 아니라 복음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도적,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희생과 섬김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현대 사회는 다종교사회, 다문화사회입니다. 각 사람은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 특혜는 사회의 평화를 깨트리고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이루어지고 보존되어야 합니다. 제도의 힘도, 숫자의 힘도 아닙니다. 복음의 힘,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의 유입을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탁월성을 제대로 경험한다면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적 특혜도 기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축소시킬 뿐입니다. 복음의 힘만으로 이 세상을 주님의 나라로 바꾸어 봅시다. 오직 복음적인 삶으로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