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열전(2) - 창세기 12:10-13:1

아브라함이 살았던 당시의 갈대아 우르는 아주 잘 발달된 도시였고, 그곳에서의 삶은 편안하고 풍요로웠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풍요로운 땅에서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당신의 크고 놀라운 계획을 보여 주셨다. 고대 사회에서의 장거리 여행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정들고 익숙한 땅, 풍요가 보장된 땅을 떠났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멀고 험한 여정이었지만, 그곳은 하나님이 보내신 땅이었다. 약속의 땅이었다. 위대한 순종을 했기에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기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하지만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서 만난 것은 심한 기근이었다. 그가 거주하던 네게브 지역은 반목초지였기에 심한 기근을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약속은 지속될 수 있을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야 할까? 버텨내기에는 현실적인 고민들이 많지 않나? 여러 가지 고민을 뒤로 한 채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떠나 이집트로의 이주를 선택함으로써 심각한 기근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집트 땅에서 기근은 피할 수 있었으나 전혀 다른 문제에 맞닥뜨린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이집트를 목전에 두고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깊어진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이집트에서는 자신을 남편이 아닌 오빠라고 칭할 것을 요청한다. 아름다운 여동생으로 인해 이집트 사람들이 자신을 후대하기를 기대했고, 그 결과 기근이 지나갈 때까지 그곳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심산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아브라함이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의 신하들이 사라의 아름다움을 왕에게 칭찬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바로가 자신의 하렘 궁으로 사라를 불러들여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다(18절).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속인 것은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었다. 뒤늦게 사실을 밝히고 아내를 되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눈 앞에서 속절없이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다.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 인간적 수단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길이 나타나는 법이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17절에서만 단 한 차례 등장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절망적인 상황을 단번에 뒤집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바로와 그의 온 나라에 큰 재앙을 내리셨고, 사라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바로 왕은 자신을 속인 아브라함에게 크게 분노했고, 그와 그의 일행을 가나안 땅으로 쫓아냈다. 기근을 피해 잠시 머물고자 했던 이집트 땅에서 아브라함이 군병들에 의해 강제로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 오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된다.

보통 “아내-여동생 이야기 (The Wife-Sister Narrative)”로 불리는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도덕적인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였다가 빼앗긴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아브라함을 평가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후손을 낳을 사라를 바로 왕에게 시집가게 만들어 약속의 후손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선 문맥 안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로 주목해야 할 본문의 문맥은, 창세기의 거대한 문맥 속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세 번 등장한다는 사실이다(창 12:10-13:1; 20:1-18; 26:1-11). 왜 모세는 족장들의 명성에 옥의 티가 되는 이야기들을 세 번씩이나 기록했을까? 소위 전형 장면(Type-Scene)이라 불리는 이 이야기는 세 번 등장하는 이야기 모두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로 주목해야 할 문맥은,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을 주신 말씀 바로 다음에 위치한다는 점이다(창 12:1-3, 7). 게다가 독자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사라가 불임이라는 사실이다(창 11:30).
사라가 불임이므로 자연스럽게 본문의 관심은 후손의 위기라는 맥락에서 벗어난다. 실제로 본문은 후손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왕의 궁전으로 간 사라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왕과 성적인 접촉이 있었는지, 왕의 하렘 궁전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에 대해 본문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두 번째 아내-여동생 이야기인 20장과 비교할 때 그 차이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20장에서는 사라가 어떠한 부적절한 관계도 없었음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아브라함의 거짓말은 분명히 책망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후손에 대한 위기라고 섣불리 결론짓는 것은 무리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약속의 후손을 낳을 어머니가 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라가 약속의 후손을 낳게 되리라는 것은 앞으로 20년 이상 지나서 알려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창 17:16). 최소한 본문이 말씀하는 만큼 이해하고 본문의 문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성경을 읽는 독자의 책무이다.

그렇다면 본문이 강조하는 문맥은 무엇인가? 세 가지 아내-여동생 이야기들 중에서 본문의 이야기만이 유일하게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특별히 19절에서, 바로 왕이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령하는 장면은 12:1에서 “가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나게 한다. 바로 왕은 신하들을 시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지 확인하기까지 한다. 이는 본문의 이야기가 약속의 땅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말씀을 받고 먼 길을 떠나왔다. 하나님께서 콕 찍어서 “이 땅”(12:7)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 물론 기근이 심각하고 반유목민이기에 이집트 이주에 이해할 만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땅”에 머무는 것은 어려운 형편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이 겪은 기근을 만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약속을 받았으며 위대한 순종을 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형통케” 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약속을 좇아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은 그 약속에 머무르기 위해 숱한 고난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막 8:34).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다(딤후 3:12).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기근이 없을 것이라 기대하지 말자. 섣불리 고난을 피하는 길을 선택하지도 말자. 오히려 어떤 어려움의 순간에도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근의 한가운데일지라도 약속에 머물러 있기로 믿음의 결단을 하자.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릿 시냇가에 머무를 때, 물이 바짝 마른 후에도 말씀이 임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음을 기억하자(왕상 17:7). 믿음의 삶에도 심각한 기근이 오겠지만, 그것을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말고, 약속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그 고난에 직면하는 삶을 살자.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단 한 차례 본문에 등장하셨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완벽히 이루셨다. 연약한 인간이 믿음 위에 서기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넘어질 때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약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지켜진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