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인데 갈 수가 없다.
내 집, 내 부모가 계신데 갈 수가 없다.
내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갈 수가 없다.
어찌한단 말인가.

고통과 한스러움이 가슴 가득할 그를 생각하니 하루 종일 내 맘 속에 돌덩이 하나가 들어앉은 듯했다. 4년간 병석에 누우셔서 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들을 끝내 보지 못하고 가셨다. 끊임없이 드렸던 우리들의 기도와 간구도 이제 끝났다. 일주일 차이로 1년 동안 간절히, 간절히 중보하던 두 영혼이 주님의 품에 안겼다. 두 분 다 한국에 계셨다. 한 분은 목원의 아버지였고, 또 한 분은 다른 목원의 언니였다. 언니의 소천 소식을 듣고 동생 목원은 한국으로 날아갔지만, 한 분은 갈 수 없는 처지여서 가슴을 찢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내 가슴도 찢어졌다. 동생같이 아끼던 그분의 맘은 어떠할까?

목사님께서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 가정에서 심방 예배를 드리자고 하셨다. 그래서 기꺼이 달려가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 중에 말씀을 전하실 때, 그리고 기도하실 때, 목사님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예배 드리는 동안 목이 메었다. 그분의 아버지는 분명 천국에 가셨을 것이므로 그 일로는 슬프지 않다. 그러나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장남의 가슴에 박힌 못은 어찌 해야 하나.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심방했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함께 예배를 드렸다. 위로의 시간이 그 가정에 큰 힘이 되었을 거란 확신이 든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안타까워하며 나눈 우리의 사랑이 예루살렘 초대 교회와 다른 것이 뭐란 말인가. 우리에게는 사랑이 파워여야 한다. 말씀은 사랑으로 덮여 있다. 사랑을 해야 완성이라 한다. 그런 공동체에 주께서 기름 부어 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내 맘에서 깊은 감격이 올라온다. 얼마 전부터 "부흥"이라는 말이 자꾸 튀어나온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 말씀이 살아나고 있고 교회가 살아나고 있다. 프로그램 위주의 교회에서 말씀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로 변하고 있다.

주님께서 그 일을 하셨고, 주님께서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신다. 우리의 기도를 주님은 기꺼이 사용하신다. 가슴 찢으며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 보았는가? 주님의 교회는 우리의 찢긴 가슴과 부르짖음 위에 세워진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날, 물어보실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까?

"너는 너의 교회를 위해 가슴을 찢었는가?"

교회의 쇠퇴를 목사님들의 책임으로만 돌린다면 교회의 신자들은 무지한 책임 전가자가 되고 만다. 기도하지 않은 책임을 물으실 주님 앞에 미리 서보자. 진짜로 그분 앞에 서는 날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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