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직전,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래서 라이벌인 그 동료가 너무 미워 다빈치는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 동료의 모습으로 그리기로 했습니다. 그게 복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얼굴이 제일 먼저 완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다빈치와 싸운 사람의 얼굴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다빈치는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작업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끝에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먼저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빈치는 성공적으로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묵상하는 하나님의 약속 365가지」, 기독신문사 출판기획부 엮음).

존 파이퍼 목사는「Future Grace」라는 책에서 20년 전에 경험한 일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느 아침, 나는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한 후 쓰레기통을 비운다는 핑계로 밖에 나왔다. 정확히 무슨 문제 때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정도에 지나친 분노와 감정에 휩싸여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쓰레기를 두는 큰길까지 걸어 가는데, 태양이 구름 사이를 뚫고 비추어 내렸다. 상쾌한 아침 바람, 반 투명의 연초록 나뭇잎들. 마치 낙원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 손에는 쓰레기가 들려 있었다. 이 땅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향해 변명과 분노를 드러낸 후 상처받은 감정과 욕구로 허둥대는 나는 쓰레기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죽음까지 몰고 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오히려 하늘의 창문을 여시고 기쁨으로 나를 보듬어 주고 계셨다. 그 시간 나에게 밀려온 감정의 변화는 나를 위한 정당화가 아니라 내가 저지른 말과 행동에 대한 처절한 후회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내에게 찌푸려야 하는 것보다 천 배 이상 내게 눈살을 찌푸리셔야 할 이유를 갖고 계셨지만, 죄로 가득한 나에게 아낌없는 은혜의 햇살을 베풀고 계셨다. 나는 즉시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아내에게 돌아가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이 그 아침에 나에게 주신 햇볕과 산들바람, 그리고 나무들 속에는 소망과 인자함, 그리고 용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당연히 여기던 권리들을 내려놓게 했고, 내 안에서 새로운 사랑이 솟아나게 했다.” 

가룟 유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분을 사랑하는 듯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날 때도 그는 예수님 곁에 남았습니다(요 6:66). 그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눅 9:1~2). 여기서 열 한 제자라고 하지 않고, 유다를 포함한 열 두 제자가 그 일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을 판 후에도 자신의 행동을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유다의 가장 큰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외부적인 환경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에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입니까? 다빈치처럼 미운 친구입니까? 존 파이퍼처럼 함께하고 있는 가족입니까? 유다처럼 사회정의 실현을 구실 삼은 이기적인 욕심입니까? 다빈치, 존 파이퍼, 그리고 가룟 유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공통점은 신앙의 방해꾼은 우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국 청교도의 최고 신학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의 정욕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 놓으라. 마음의 걱정을 덜기 위함이 아니라, 정욕이라는 죄를 깨닫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라. 그리고 당신이 창으로 찌른,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그분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대의 영혼에 호소하라. ‘내가 무슨 짓을 하였단 말인가! 내가 어떤 사랑과 자비와 보혈을, 그리고 어떤 은혜를 멸시하고 짓밟았단 말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예수님의 보혈에, 그리고 성령의 은혜에 내가 보답하는 행동이란 말인가!’” (「프레어」빙햄 헌터).

정욕, 미움, 그리고 이기심과 같은 죄로 얼룩진 우리 마음,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그 마음을 다스리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마음을 그대로 예수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그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용서를 구하고, 그분이 주시는 쉼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이 평안과 쉼이 당신에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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