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자유함의 결과

이런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이미 자유함을 얻은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불행 혹은 극단적인 죽음까지 부여한다 해도, 그 결과에 무조건 순복하게 된다. 우리의 영적인 자유함이 헌신적인 의지와 마음의 평화로 승화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 것에 대해 감사와 찬양과 존귀를 올려 드린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문제가 우리의 능력 밖에서 해결된다는, 그리고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들이 우리의 주권을 타자인 하나님께 넘겨드리고 대신 그 분별의 결과는 짊어진다는,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역학적 신비는, 우리들의 영적 자유함과 그로 인한 자발적이고 거룩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려운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나의 모든 생각까지 내려놓는다는 것이, 그리고 주님이 주신 고통까지 부둥켜안고 간다는 것이,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쉬운가? 어렵고도 어렵다. 하나님의 신비는, 이 어려운 길의 시작이 곧 우리들이 영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를 결정하고 분별하는 일은 도리어 쉬울 수 있다. 지구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분별/결정의 과정에서 좌절하고 실패를 맛보는 것은 바로 그 선택의 최종 순간에 실수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자유함 없이 이런 분별의 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엉킨 타래줄은 끊어내기 전까지는 원상태로 돌리기가 어려운 것처럼 분별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자유함이 문제다!

주님의 제자들이“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잠깐만요”하고 지체한 적이 있었던가? “사흘만 말미를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라고 예수님을 붙잡았던 자가 있었던가? 그들은 이름이 불려졌을 때 바로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에 의해 불려졌을 때 그들의 마음은 빈 공간의 상태가 되었으며,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가족마저 떠났고(“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의지(“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만 있었다. 그들의 머리가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의 머리처럼 핑핑 돌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님의 거룩한 초청에 그들의 머리는 도리어 단순해졌고, 그래서 머리 회전이 느려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기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예수님 시대에 가장 영리했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번 자 중의 한명인 삭개오를 보자(눅 19:1-10). 그는 “나무에서 내려오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에 이미 계산감각을 상실했고, 그래서 예수님 일행을 집으로 맞아들였고,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자기 재산을 털어 가난한 자들과 빚 진 자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 복잡한 우리들의 머릿속을 비워낼 수 있을까? 간단하다. 다음의 세 단어대로만 하면 된다.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동안 건재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이유다. “와서 나를 따르라!”(눅1 8:22)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알아서’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요 8:31).

영적 자유함을 위한 기도

우리가 21세기 들어 이렇게 복잡다단하게 살 줄 미리 알았다는 듯, 수백 년 전부터 미리 우리들의 영적인 자유함을 위해 기도했고 16세기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중세의 사상가 에라스무스의 기도와 사막의 성자라 불리는, 가톨릭 트라피스트 수사로 알제리에서 이슬람인들을 위해 살다가 그들의 의해 순교 당한 샤를 드 푸코(Charles Eugene de Foucauld:1858~1916)의 기도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테제에 있는 초교파적 예배 및 기도 공동체에서 불리는 노래를 소개한다. 예수의 테레사라고도 불리는 스페인 아빌라의 테레사의 기도문을 기초로 만든 것이다. 기도로, 노래로 우리들의 영적인 자유함을 갈구하자! 그러면 분별하게 될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기도

“저를 자신에게서 끊으시어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제가 자신에 대하여 멸망하여 당신 안에서 안전하게 하소서. 제가 자신에게 죽어 당신 안에서 살게 하소서. 제가 자신에게 시들어 당신 안에서 꽃피게 하소서. 제가 자신을 비워 당신 안에서 풍성하게 하소서. 제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하소서.”

샤를 드 푸코, 스스로를 내맡기는 기도(Prayer of Abandonment)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나님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I abandon myself into your hands; do with me what you will. Amen!

테제 공동체 ‘나다 떼 뚜르베’(Nada te Turbe : 어떤 것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요한복음 14:27)

“어떤 것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떤 것도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도 하나님만이 머무르십니다. 인내가 결국 목적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체이신 그분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만이 충분하십니다. 당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십시오. 어느 것도 당신을 성가시게 하지 마십시오. 어느 것도 당신을 산만하게 하지 마십시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그리고 어떤 결과가 초래하더라도 어느 것도 당신을 두렵게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영광을 보십니까? 그것은 헛된 영광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영원히 지속될 천상의 신실하고 부요한 약속을 바라십시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충분하신 분입니다!”
God alone suffices! God alone suffices! God alone suffice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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