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2:46-50).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찬송가 204장 3절 가사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처럼, 세상과 내가 간 곳 없어져야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에, 세상의 방식을 떨쳐버리지 못하기에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를 수 없습니다. 자아가 여전히 살아 있기에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만큼 중요하게 세상에 대하여 똑바로 눈을 떠야 하고, 자아에 대하여 정확히 파악한 다음 그 자아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은 '세상과 나'입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삶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을 모집한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와 야고보와 요한 형제였습니다. 이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또 다른 제자는 레위 혹은 마태로 기록되어 있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들은 부를 누렸지만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천한 직종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12명의 제자들 중에는 무장 투쟁 세력인 열심당이라고 하는 젤롯에 속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가롯 유다는 오늘날의 테러리스트에 해당하는 '시카리'였다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세금을 내는 어부와 세금을 걷는 세리, 그런 세리를 찔러 죽이던 시카리와 젤롯이 섞여 있었습니다. 또한 여성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상한 집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생업 수단을 버리고 기존의 사회적 위치로부터 기꺼이 이탈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죽어가는 아버지까지 버려야 그분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케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 이 기록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가부장적인 사회제도를 뒤흔드는 발언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4-35).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종교적인 성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반사회적인 것이었습니다. 혈연에 기반을 둔 가족 제도와 그 위에 세워진 모든 질서에 대한 반대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가진 전복적인 일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리자 그분은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마 12:48) 그리고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50)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야말로 그분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일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관계를 세상에 알리시면서 가족제도조차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가족제도를 해체하고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자들 모두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세례 요한과 같은 부류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을 참된 선지자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수님 또한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세례 요한의 길과는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비롯하여 엄격한 금욕적인 생활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무리들은 금식도 하지 않고 엄격한 금욕생활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의문을 제기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19-20).

예수님의 무리들은 사람들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보(파고스)'에 '술꾼(오이노포에스)'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차마 그대로 옮길 수 없었는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11:19)이라고 완곡한 표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 준수를 통해 유대 전통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에 예수님의 더럽고 불경한 행동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느냐의 문제는 가족 제도와 마찬가지로 사회 질서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식탁에서는 신분, 성별, 직업과 같은 사회적 구분들이 엄격하게 구분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같은 부류라는 표시였습니다. 세리처럼 돈밖에 모르는 매국노들과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정결하지 않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파행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인 면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면까지 전복하셨습니다. 세상적인 모든 것을 뒤엎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혁명은 권력자를 다른 권력자로 교체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혁명은 권력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한 사람들, 즉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가족이나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더 이상 권력을 얻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세상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2-45).

불행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았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행 4:32-35).

그러나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은 세상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았습니다. 억압이나 박해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오랜 박해가 끝나고 마침내 신앙의 자유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박해 받는 변두리 종교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누가 보아도 기독교의 승리이며 하나님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구도 그것이 사단의 계략이며 기독교의 몰락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패했던 정사와 권세가 신앙의 자유와 함께 당당하게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정사와 권세의 하수인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세상을 정복한 것 같았지만 실상은 세상이 기독교를 정복했던 것입니다. 그 불행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도 부패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던 정사와 권세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톨릭과의 오랜 전쟁을 거치며 힘의 사용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정사와 권세는 더더욱 안정된 입지를 다졌고 기독교는 사단의 수하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세상과 복음이 뒤엉켜 어느 것이 복음이고 어느 것이 세상인가를 구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진리의 특성상 혼재는 곧 진리의 사멸을 의미합니다. 이제 순전한 복음의 회복을 위해 다시금 세상과의 결별을 선언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면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면까지 온전히 뒤집어야 하는 국면에 봉착해 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복음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한국의 기독교에는 한국 특유의 정서와 사회적 현상이 복음과 뒤섞여 있습니다. 정수복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은 한국인의 12가지 문화적 문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문화적 문법이란 한국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대중적인 규칙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당연의 세계 낯설게 보기"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저자는 당연시 여기는 행동의 사회적 원칙들이 절대적인 보편타당성을 지닌 것이 아니며 시민사회와 건강한 개인주의의 성장을 위해 개선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가 분석한 12가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세상의 방식들을 걸러 보겠습니다.

1) 현세적 물질주의
현세적 물질주의는 지금 여기에서의 물질적인 행복을 인생 최고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리킵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로 요약되는 이 가치관은 한국의 자본주의를 윤리성이 약한 천민자본주의로 만들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현세적 물질주의 타파의 선봉이 되어야 할 한국교회가 오히려 현세적 물질주의에 편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현세적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사는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2) 감정우선주의
감정우선주의는 합리성과 원칙보다 정서와 감정을 앞에 놓는 경향을 말합니다. 한국인들은 로고스보다는 파토스가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감정우선주의는 쉽게 종교적 열광주의와 일치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무질서한 은사주의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을 무지와 맹신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성은 물론 우리의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있는 직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세상 사람들과 교감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3) 가족주의
가족주의는 가족의 이익을 최우선의 자리에 놓는 사고방식입니다. 가족주의는 보편성에 기초한 시민사회의 성장을 가로막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삶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상의 기족 제도를 떠나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모두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교회는 가정이 천국이라는 왜곡된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주의 역시 하나님 나라에서는 걸림돌이 되는 장해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4) 연고주의
연고주의는 핏줄을 나누거나, 같은 고향 출신이거나.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끼리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 서로 돕고 특권을 나누는 배타적 집단의식을 말합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알포드가 지적했듯이 한국에서는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어떻게 아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저 역시 연고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가족은 물론 연고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관계로의 출발입니다. 거기에서는 국적도 지역도 성별도 지위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라면 그분의 몸 역시 하나여야 할 것입니다.

5) 권위주의
권위주의는 한국에서 인간관계가 기본적으로 수직적임을 뜻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사회적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습니다. 하급자가 상급자의 자질, 능력, 인격 등을 스스로 인정할 경우 상급자는 하급자에 대하여 권위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상급자가 하급자의 승인 없이 상급자라는 이유만으로 복종을 강요하면 권위주의가 되고 맙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이러한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섬김은 말뿐이고 지배와 착취가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을 영적으로 구별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각과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고 각각의 지체들은 생명을 나누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6) 갈등회피주의
갈등회피주의는 대립적 상황이 주는 심리적 불편감을 잘 참지 못하는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서양 문화가 세상을 갈등, 대립, 지양의 변증법적 관계로 본다면 동양문화는 세상을 조화와 화해로 보고 대립과 갈등을 병리적으로 봅니다. 갈등회피는 한 마디로 자신을 죽이는 일을 습관화시킵니다. 서로 대등한 관계가 된다면 갈등을 회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갈등을 드러내 해결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갈등을 회피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 줍니다. 서로가 잘못을 드러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 때 갈등 없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살롬'에는 갈등 해결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감상적 민족주의
감상적 민족주의는 강대국의 냉혹한 자국이기주의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굴욕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배경으로 합니다. 민족주의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이며 감상적인 민족주의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기 민족은 물론 타 민족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게 만듭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는 철칙과도 같았던 이방인과의 벽도 허무셨습니다.

8) 국가중심주의
국가중심주의는 국가가 견인차가 되어 사회 전체를 일사분란하게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만주와 일본사관학교에서 국가주의 틀 안에서 훈련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철저한 반 개인주의적 국가주의자였습니다. 전인권 씨에 따르면, "그는 근대 이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선 공동체의 삶이 중요하지만 개인의 권리가 무시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자발적인 동의가 합의의 출발점입니다.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참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애국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국적은 한국도,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비폭력 평화를 실천했던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9) 속도지상주의
속도지상주의는 무엇보다 20세기 한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문법입니다. 식민지 경험은 우리가 세계 역사에서 뒤처진 후진국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후진국 상태에서 벗어나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한국사회의 속도 숭배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어가 "빨리빨리"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나라입니다. 우리의 조급함은 하나님의 선물을 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중독이나 업적주의에 사로잡히는 것도 속도지상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가급적 느리게 사는 삶이 신앙적인 삶이라는 것을 늘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10) 근거 없는 낙관주의
합리적 판단에 기초하지 않고, "하면 된다."라는 구호가 힘을 발휘하고 "안 되도 되게 하라."는 모순 어법이 통하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불도저전법과 탱크주의라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 전법이 통하는 사회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 9:23)와 같은 말씀들을 내세워 밀어붙이기식 낙관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끝나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려는 노력을 멈출 때 하나님 나라의 여명은 밝아오는 것입니다.

11) 수단방법 중심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는 삶의 목표에 대한 성찰이 약한 반면에,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방법 강구에 강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인은 무엇이 선하고 좋은 사회이고 무엇이 선하고 좋은 삶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질 여유가 없었고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선진국 진입과 가족의 물질적 행복은 사회적으로 공언된 자명한 목표이자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수단이 결과보다 더 중요한 나라입니다. 수단이 올바를 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도 사람이 중심 되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2) 이중규범주의
이중규범주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윤리의식을 가리킵니다. 겉으로는 보편적 기준을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사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문화적 풍토를 말합니다. 이런 풍토에서는 가치와 습관이 일치하고, 말과 행동이 같고, 느낀 바를 솔직히 표현하는 인간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는 나와 너가 다르지 않은 나라입니다. 아무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된 관계는 이중규범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자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12가지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경향입니다. '세상과 나'는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역시 상식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복음 역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언가 세상의 통념에 반대되는 것들에 대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입니다. 삶의 방식 역시 달라야 합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지 못하는 이면에는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세상과 나'에 대한 인식과 성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용기 있게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모험으로의 투신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삶은 세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삶을 요구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는 그러한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떨쳐버리고 무엇보다 돈의 강력한 유혹을 떨쳐버리고 주님을 좇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세상과 나는 간 곳"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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