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열전(3) - 창세기 13:2-18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떠난 것이 문제였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끝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애굽에서 쫓겨나듯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은 원래 부자였지만, 애굽에서 더 큰 부자가 되었다(2절). 그리고 “아브라함의 일행”인 롯 역시 큰 부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일행이라는 수식어가 낯설다.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롯은 자신의 후사가 될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롯은 사라보다 먼저 언급되기도 한다(11:31). 그러나 엄청나게 불어난 재산 때문에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다. 두 사람의 목자들이 서로 자신의 양떼에 꼴을 먹이기 위해 다투었고, 그로 인해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롯을 “형제(개역개정은 “친족”으로 번역)”라 칭하여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지만, 그들이 더 이상 같이 지낼 수 없음은 기정사실이었다(8절).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했다. 롯이 좌편을 선택하면 자신이 우편을 택할 것이고, 롯이 우편을 선택하면 자신은 좌편을 선택하기로 했다. 여기서 좌편과 우편은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방향과는 차이가 있다.

나안 땅은 동서의 길이가 짧고 남북으로는 길게 뻗은 땅이므로. 아브라함이 좌우를 이야기했을 때 좌우는 사실상 남북이었을 가능성이 많다(아브라함이 좌우를 말했을 때 롯이 눈을 들어 동편에 있는 땅을 보았으므로 좌우는 남북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또한 약속의 땅 전체가 두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견해에도 무리가 있다. 롯이 약속의 땅 안에 있는 남북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벗어나는 동편을 선택한 것은 그가 약속의 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두 사람의 선택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기근 때문에 내려갔던 애굽 땅에서 두 사람은 무엇을 보았고, 애굽에서 겪은 일들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가나안 땅에서의 그들의 여정을 보면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위의 표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은 처음 약속을 신뢰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드렸던 그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다시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4절). 이처럼 아브라함의 여정은 약속의 땅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재확인하고, 약속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그 땅을 걸으며 회복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똑같은 애굽을 겪었지만 롯은 삼촌 아브라함과 다른 면을 봤던 것 같다. 그는 신앙 회복의 길이 아니라, 애굽이라는 세상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땅을 선택하려던 순간, 롯은 가나안 땅이 아닌 동편의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함을 보았다. 심지어 하나님의 동산 같아 보였고, 애굽 땅같이 보였다(창 13:10-12). 롯의 시각은 하나님의 시각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하나님께서 소돔의 죄악을 지적하셨지만, 롯에게 그곳은 그저 좋게만 보였다(13절). 그렇게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가치를 좇아 하나님의 눈에 악한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자신의 눈에 좋은 땅, 애굽과 같아 보이는 땅을 선택함으로써 영적인 시력을 잃은 존재임을 증명한 롯은, 즉각 짐을 싸서 “동쪽”으로 이동해 소돔으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요단 계곡에 자리잡았지만 점차 소돔 성 가까이 향했다(12절). 그곳은 부요한 땅이었고, 물이 풍부해 기근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장소였다.

대체로 창세기에서 동쪽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달한다. 아담과 하와의 에덴 동편 이주(3:24), 가인의 동쪽 이주(4:16), 그리고 동쪽으로 이주해 바벨탑을 쌓은 사건(11:2) 등의 이야기를 통해 동쪽으로의 이주는 하나님의 심판과 그분으로부터 멀어짐을 암시한다.  물론 소돔이 가나안 땅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 땅은 사해 바다와 요단을 동편의 경계로 정해두었기 때문이다(창10:19; 민 34:2-12). 그러나 롯이 가나안 땅에서 멀어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 롯의 후손인 암몬과 모압은 요단 동편으로 건너가서 가나안 경계 밖으로 이주했다.

이제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 보자. 아브라함은 앞의 본문에서(창 12:10-13:1) 자기의 목숨을 위해, 혹은 약속의 성취를 위해 아내를 포기하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조카 롯에게 약속의 땅의 중요한 부분마저 포기할 만큼 양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러 사람들이 이 본문을 다양하게 이해한다.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도덕적으로 성숙하여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조카에게 양보함으로써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양보가 신앙인의 훌륭한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롯에게 땅의 선택을 양보함으로써 약속의 땅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주장한다. 이럴 경우 아브라함은 여전히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인물이 되고 만다.

그런데 문맥 안에서 본문을 일관되게 읽으면 또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 적어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롯은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후사를 약속하셨는데 정작 아내는 불임이었기에(11:30), 롯은 언제나 아브라함에게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최소한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에게 롯이란 존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이었다.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은 롯에게 약속의 땅을 포함한 거주지를 택할 권리를 양보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그리고 약속의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결단은 비록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사를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후사를 지키고자 하는 결단이었다.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약속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열정을 하나님께서 아셨다. 롯이 떠난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더 발전된 형태의 약속을 주신다. 약속의 땅을 직접 밟게 하시며, 그 땅들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재확증하신다. 12장 7절에서는 땅에 대한 약속을 “너의 자손”에게라고 말씀하셨지만, 본문에 이르러 처음 “너에게 내가 주고 네 자손에게”줄 것이라 약속하신다. 게다가 그의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지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땅의 범주가 아직 구체화되어 있지 않지만, “네가 보는 모든 땅”이라 말씀하신다. 롯이 요단 온 땅을 선택하고 떠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다시 보여 주신 것이다(창 12:2). 직접 그 땅을 돌아다니며 반복해서 걷게 하시고, 밟는 모든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겠노라 다시 약속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땅을 밟고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경배했다. 지금은 나그네 같으나 하나님께서 지으실 성을 바라보며 미리 그 땅을 누리는 삶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땅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구경하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온 땅을 바라보면서 아브라함은 얼마나 감격했을까!(실제로 헤브론은 남부 산악지대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다) 지금은 비록 한 평의 땅도 가지지 못했지만, 약속을 붙들고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눈으로, 발로 도장을 찍고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에 기대와 흥분이 가득하다.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누리며,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믿음이다(히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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