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임을 믿으면서, 지난 호에 이어 두 번째 생일 유감을 나눕니다.  올해는 사제가 된 지 25주년을 맞이하는 해여서 생일 유감은 곧 사제생활 25주년 유감이기도 합니다. 사제서품 기념일 즈음에 제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사제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를 살피다 보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오늘까지 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인생 공부의 길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에게 천사들은 “다른 길”로 가라고 했습니다. 사제서품 25년의 길도 다른 길로 돌아서 온 길이었습니다. 다른 길로 돌아서 온 그 길은 인생을 공부하고, 제 자신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공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그의 책 『담론』에서 공부(工夫)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 이처럼 공부란 세계인식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창조입니다.”(18-19쪽)

니체는 ‘철학을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제 삶의 자리를 옮기고 확장시켜 주시면서 인식의 틀을 깨는 작업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강화도 마니산 기슭에서 태어나 자라게 하시고,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게 하시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그리고 미국 시카고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꿈도 꾸지 않았고 신부가 될 때에 소원해 본 적 없는“다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분명 한국과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사목과 삶은 돌아서 온 공부였습니다. 2000년 교회 제단 공사가 잘못된  이후의 길 역시 다른 길로 돌아온 것이었고 인생 공부였습니다. 지금의 임지를 떠나고 싶어했지만 하나님은 다른 길을 준비하셨고, 2009년 교회를 새 장소로 옮길 때에도 역시 다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다른 길을 걸어온 일은 끊임없이 나 자신과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틀을 깨고 확장하는 공부의 시간, 즉 인생을 배우는 시간, 나 스스로 인간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길, 돌아서 온 길에서 하나님 은총의 발자국을 보며 감사합니다. 때론 망치로 얻어 맞아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그러면서도 앉은 자리가 꽃자리가 되도록 함께 해준 가족, 친구, 교우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

신영복 선생은 그의 책 『담론』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발로의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문맥을 뛰어넘는 탈 문맥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성(cool head)보다 가슴(warm heart)을 키우는 일입니다. 가슴은 세계를 조직하고 진리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인식과 실천의 전 과정을 감당하게 하는 애정(愛情)으로 작동합니다.  (...) 우리는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변화입니다. 발은 공존과 관용(tolerance)을 뛰어넘는 소통과 변화이며 탈주(desertion)와 유목주의(nomadism)입니다. (...) 그것은 존재(存在)에서 관계(關係)로 나아가는 것이며, 관용(寬容)에서 변화(變化)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0-21쪽)

저는 인생의 긴 여정 중에서 아직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여행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왜 그 여행이 더딘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제 인격과 실천이 부족해서입니다. 하지만 변명 아닌 변명, 제 기도와 열정을 말씀드리자면,“이 사람들이 진리에 몸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7)는 사제가 되기 전에나 후에나 제겐 가장 중요한 명제였습니다. 대한성공회에서 발행한 사제생활 지침에선 다음과 같이 사제와 사목지침을 시작합니다.

“사제는 (...)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처럼 생활하면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이어받아 수행하도록 특별히 선택된 인물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란 이 세상 사람들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여 하늘나라를 만들고,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전하게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진리를 붙잡아 깨닫는 일을 최우선적인 일로 해야 한다.”(13-14쪽)

제가 사제가 되었을 당시의 사제서품 예식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주교의 질문) 성경 읽는 것과 성경에 관한 공부를 부지런히 하겠느뇨? (사제 후보자의 약속) 주께서 나를 도우심으로, 내가 그대로 하기를 힘쓰겠나이다.”(대한성공회 공도문, 1966년, 769쪽) 저는 하나님의 진리에 목말랐고, 그 진리에 열심을 냈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성서를 읽고 가르치고, 교육 자료를 만들고, 또 성공회가 믿고 실천하는 진리를 알고 싶고, 알리기 위하여 책을 썼습니다. 지금도 이 부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계속 몸바치고 싶습니다.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

제게 가장 부족한 부분은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임을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공도문은 말합니다. “맡은 신자를 교훈하며, 성덕(聖德)을 세워 (...) 성경에 있는 도리와 훈계로써 가르치고, 자기도 그대로 행함으로 이룰 것이니라. (...) 너와 네 가속(家屬)의 거룩한 생활로써 사람에게 선한 모본되기를 바라노라.”(766-767쪽)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머리에서 가슴까지 오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위로는 되지만 가장 먼 그 여행의 중간에도 이르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아직도 저는 자기중심적이고 과업중심적이어서 사랑이 모자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사제생활의 지침은 “양들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수고하고, 자기 양들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30쪽)고 가르치는데, 참된 목자로서 양들을 잘 돌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저처럼 과업중심의 사람들은 관계중심의 사람들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집니다. 일이 우선이다보니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자비를 나누는 부분이 약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멈추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은 함께  연대하여 변화를 이루어 내는 일입니다. 이 부분 역시 부족하기만 합니다. 연대의 폭이 좁아 제가 사목하는 교회 역시 규모가 작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교제하고, 연대하고, 공부(工夫)의 삶을 살아가고, 함께 변화하고자 애쓰는 지역목회자 친구들이 있어서 위로가 됩니다.

머나먼 여행에 함께 해준 아내와 가족, 친구와 교우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고 모범을 보이지 못하더라도 용서해 주시고, 인내하며 기다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우리는 여행 중이니까요.(삽화 - 신영복의 머나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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