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3-15).

강아지 똥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권정생 선생이 쓴 "강아지 똥"이라는 제목의 동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돌이네 흰둥이가 골목길 담 밑에 똥을 눴습니다. 그래서 강아지 똥이 태어났습니다. 강아지 똥은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참새가 쪼아보고는 더럽다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소달구지 바퀴 자국에서 뒹굴던 흙덩이도 "넌 똥 중에서도 제일 더러운 개똥이야!"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외톨이가 된 강아지 똥은 스스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봄비가 내리던 날, 파란 민들레 싹이 돋아났습니다. 민들레가 예쁜 꽃을 피울 거라는 말을 듣고 강아지 똥은 부러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아지 똥은, 민들레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거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강아지 똥이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들레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단다." 민들레가 도움을 요청하자 강아지 똥은 너무 기뻐서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아 버렸습니다. 사흘 동안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강아지 똥은 자디잘게 부서져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민들레 뿌리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봉오리를 맺었습니다.

이 동화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향긋한 꽃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 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

권정생 선생은 처마 밑에 버려진 강아지 똥이 비를 맞아 흐물흐물 녹으며 땅 속으로 스며드는 그 옆에 민들레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 동화를 지었다고 합니다. 권정생 선생은 민들레꽃에서 강아지 똥의 희생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를 맡았습니다. 동화 "강아지 똥"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오롯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동화의 주인공은 흔히 왕자나 공주입니다. 그런데 그런 존귀한 신분과는 거리가 먼 '강아지 똥'이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강아지 똥처럼 사셨습니다. 강아지 똥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며 또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꿈꾸셨던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나 맛볼 '지복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경험하는, 또는 경험해야 할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삶의 충만함으로 구현됩니다. 따라는 하나님 나라는 삶을 짓누르는 일체의 억압에 대한 저항입니다. 죄와 가난, 억압과 착취, 질병과 소외 등등.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비유를 통해 그것이 극복된 세상을 권정생 선생의 동화 "강아지 똥"처럼 그림 언어로 들려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결코 위대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른 그분에게는 최소한의 권위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전능함과 권위를 완전히 벗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관습상 발을 씻어 주는 일은 가장 천한 일이었고 종들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발을 씻는 종은 이방인 종이었고 유대인 종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대 사회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 종들도 하지 않는 일인데 어떻게 유대인의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메시아이신 그분이 인간의 발을 씻어 주기 위해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자들은 스승인 랍비를 인격적으로 섬기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 사회의 관습을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은 인식의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제자들이 얼마나 당혹감에 사로잡혔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나가시다가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태도는 사양을 넘어 항의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에 스승이신 예수님은 섬김을 받아야 하지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왕위에 오르시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권위와 영광을 얻는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섬기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예수님께 대한 존경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제자로서 어떤 특권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가 숨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수치와 고난이며,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몇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단호한 그분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발을 씻도록 맡겼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예수님을 만류하였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보다 더 단호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최후통첩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인류를 위한 희생적인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완성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배하고 섬김을 받는 세상의 왕의 길을 포기하고, 수치와 고난을 받는 약자의 모습으로 인류를 섬기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 즉 메시야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사단적인 교만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거부하는 베드로의 태도는 겉보기에는 겸손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남을 지배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완악함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위계질서와 도덕적 가치가 설 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상식과 관습이 설 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기대와 환상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폭력 없는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12)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행동이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씻어 주시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음을 밝히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제자들을 지배욕과 권력욕으로부터,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인류를 궁극적으로 모든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권위와 생명을 버리심으로써 제자들과 온 인류에게 참된 삶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희생으로 피어난 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꽃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이나 영광에 도취된 꽃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권정생 선생의 동화에 나오는 강아지 똥의 도움으로 피어난 민들레꽃처럼 스스로를 비우고 낮아져 섬김으로써 또 다른 꽃을 피워내는 강아지 똥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겨자풀의 나라

주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겨자풀의 비유입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갈릴리 지역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낮은 지역에선 노란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겨자꽃입니다. 특히 갈릴리 지역에서 겨자는 도처에 흩어져 피어나는 흔하디흔한 들풀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겨자를 얻기 위해 씨를 파종하거나 재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겨자를 얻고 싶다면 그저 밖에 나가서 훑어 따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의 밭을 깨끗이 간 후에 겨자씨 한 알을 가져다 심는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보 같은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는 백향목의 나라가 아니라 겨자풀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 '하찮은 것', '변변치 못한 것'의 동의어였습니다. 게다가 겨자풀은 번식력이 좋아 급속히 퍼질 뿐만 아니라 토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농부들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겨자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대개 백향목으로 형상화되곤 했습니다. 백향목은 기품 있고 아름답고 귀했습니다. 성전이나 제단 혹은 궁전을 짓는 데만 사용하던 최고급 나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땅히 그런 나무 같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풀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향목 같은 사람들과 나라의 폭력성을 보신 것입니다. 로마야말로 백향목 같은 나라였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세계를 복속시키고, 화려한 문화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나라, 하지만 그 이면은 참혹 그 자체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피식민지 백성들의 삶은 가혹한 수탈로 인해 거덜이 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특권층에게만 천국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 로마 제국 아래서 예수님은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계신 것입니다. 강아지 똥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천대 받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지는 곳, 그런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기꺼이 자기를 바쳐 희생하고 섬길 때 생명의 역사는 꽃으로 피어나고 열매를 맺어 풍성한 샬롬의 나라를 이루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맺는 관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위대한 인물이 되려는 사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 많은 돈을 벌고, 많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 서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관계만 맺을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겨자씨와 같은 사람들, 강아지 똥 같은 사람들만이 영구적인 관계를 맺고 자기를 희생하여 섬김으로써 생명의 꽃을 피워내고 풍성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만나게 하신 모든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기꺼이 빗물에 녹아내리는 강아지 똥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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