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플랫 지음 / 두란노 펴냄

 

복음을 거스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거스를 것인가? 『카운터 컬처』는 문화의 진보를 핑계 삼아 선악의 기준을 바꾸려는 시대정신에 복음으로 맞서는 책이다. 빈곤, 동성애, 성 노예, 난민, 박해, 낙태, 고아, 포르노 등 모든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문화가 아닌 복음에서 찾아내는 책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묻는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특정한 사회문제에 열정을 그러내는 걸 보면 적잖이 격려가 되는 반면, 똑같은 크리스천들이 또 다른 이슈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걸 보면 상당히 걱정이 된다. 빈곤, 인신매매, 고아의 문제에 대해선 목소리를 높이지만, 동성애와 낙태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러한 선별은 대개 현대문화와 부대끼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기준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가 문화에 맞서라고 등을 떼미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저자는 복음이 ”기독교 신앙의 생명선인 동시에 대항문화의 원천”이라며, “복음을 믿느냐?”고 도전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 문화에 맞서 입을 열라고 강조한다. 현대문화와 적당하게 타협하는 대신에 주님을 믿고 성경 말씀을 따르는 길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크게 ‘복음과 문화, 사상 최대의 충돌 앞에서 / 내가 선 땅의 고통에 복음으로 답하라 / 복음과 문화가 충돌할 때 성경의 가치를 사수하라’는 제목의 3부로 나누어 10개의 장에서 현대의 중요한 이슈들에 대한 성경적인 해법을 모색한다. 각 장의 제목에 이미 문제와 답이 제시되어 있다. 1) 복음과 문화: “사회 흐름이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복음으로 길을 내라. 2) 복음과 가난: “조금만 더 벌면 좋겠다.” 물질주의 문화에 자족과 나눔의 반기를 들라 3) 복음과 낙태: “이게 모두에게 최선이야” 어떤 경우라도 생명은 살아야 한다. 4) 복음 그리고 고아와 과부: “내 문제만으로도 버겁다” 크리스천 당신이 그들의 가족이다. 5) 복음과 성 착취: “마음 아프지만 한 사람이 바꿀 수 없는 사회 병폐야” 성의 노예로 전락한 소녀들을 위해 울라 6) 복음과 결혼: “동성애는 개인의 취향 아냐?” 최초의 디자인에 이런저런 손을 대지 말라. 7) 복음과 성윤리: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날마다 은혜 안으로 도망가라. 8) 복음과 인종: “나와 다른 사람은 왠지 거부감이 들어”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이주민이다. 9) 복음과 신앙의 자유: “기독교는 관용이 부족해” 사람에게는 관용하되 믿음에서는 불관용하라. 10) 복음과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아직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들이 있을까?” 기도하고 참여하며 선포하라.‘

각 장의 마지막에는 ‘문화를 거스르는 카운터 컬처의 첫걸음‘이란 제목으로 기도와 참여, 선포할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데이빗 플랫(David Platt)은 조지아 대학을 졸업하고 뉴올리언스침례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침례신학교에서 학생처장 겸 조교수로 강해설교와 조직신학을 강의했고 뉴올리언스 엣지워터침례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했다. 브룩힐즈교회를 담임하면서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 과연 가능한지를 검증하기 위해 ‘래디컬 실험’을 했다. 지금은 교회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서 그리스도가 주신 소명을 다하도록 돕는 ‘래디컬’(Radical, radical.net) 단체를 설립,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삶을 일러 주고 있다. 저서로는 베스트셀러인 『래디컬』, 『래디컬 투게더』, 『팔로우 미』가 있다.

(본문 중에서)

복음의 공격성은 성경 첫 구절에서 드러난다.(창세기 1:1)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시며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존재한다는 주장이야말로 복음이 던지는 첫 번째 도전이다...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대를 하루하루 먹이고 입히시며 주인이 되시고 한계를 정하시고 다스리시며 언젠가는 심판하신다”고 이야기하면, 대번에 흠칫하며 불쾌해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뱀의 질문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선악의 차이를 아는 게 어째서 큰 잘못인 거지?“라고 의아해할지 모르나,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앎‘이란 선과 악에 대한 정보의 차원을 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첫 인류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선악 판단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직접 그 책임을 떠맡으려 했음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던진 유혹의 본질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역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도덕을 재단하는 결정권자가 되었다. 이 원초적인 죄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면 21세기를 풍미하는 윤리적 상대주의는 전혀 새로울 게 없다.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거나 심지어 말살하려 든다면, 선과 악, 옳고 그름, 도덕과 부도덕을 나눌 객관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제 욕구에 충실하면 돼.”

그런데 남에게 ‘피해’가 되고 말고를 누가 결정하며 어느 정도까지 욕구에 충실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배제시킨 윤리관은 냉엄한 악의 실체에 직면하는 순간 공허한 실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다. 감사하게도 복음은 그런 점에서 지극히 반문화적이다... 죄란, 만물의 선하신 창조주며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반역 행위를 가리킨다.

인간은 존엄한 속성과 부패한 성품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역설적인 상황이다. 어째서일까?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좇아 사람을 지으셨지만, 인간은 창조주의 뜻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살기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복음은 설명한다. 그러나 윤리의 토대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주신 객관적인 진리에서 주관적인 관념들로 바뀌어 간다. 결국 저마다 자신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으뜸으로 끌어올리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핵심이다. 창조주는 인간을 설계하시면서 주님을 으뜸자리에, 이웃을 버금자리에, 그리고 자신을 그 마지막 자리에 두게 하셨다. 하지만 죄는 그 순서를 뒤바꿔 버린다. 자신을 첫손에 꼽고 다른 이들은 다음으로 치며, 하나님은 무대 뒤편 어딘가로 멀찌감치 밀어낸다... 이 모든 흐름에서 가장 비극적인 대목은 자신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끊임없는 갈망에 사로잡혀 사노라면 죄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신을 섬기는 데 온 힘을 쏟느라 정작 영혼의 여백을 차고 넘치게 채워 줄 유일한 존재를 거부하고 외면한다. 한 마디로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에 빠져 있다. 따라서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제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이 심령에 새겨놓은 ‘해야, 또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감각을 말짱히 닦아낼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실체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며, 그래서 반드시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삶은 독특함 그 자체다. 주님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다. 온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란 뜻이다. 온전한 인간이시기에 인류를 대신해 홀로 죄를 담당하실 수 있고, 완벽한 하나님이시기에 거룩한 공의를 만족시키실 수 있다. 바로 그 점이 예수님의 죽음을 특별하게 만든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의 정점일 수밖에 없다. 십자가는 예수님, 곧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 스스로 그 벌을 받으신 곳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해 죗값을 치르심으로써 어떤 죄인이든 구원받을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복음의 공격성과 마주친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외길입니까?” 이 물음 자체가 문제이다. 인간은 제 스스로 길을 만들고 싶어 한다.... “주님을 따르면 영원한 삶을 누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지옥을 겪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현대문화(오늘날의 교회)를 통틀어 가장 치열한 논쟁을 촉발하는 뇌관을 건드렸음을 깨달을 것이다. 복음은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영원한 삶이 달렸다고 단언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천국이 영광스러운 실제가 된다고 가르친다. 하늘나라는 죄와 고난, 고통과 근심이 마침내 그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이들이 하나님과는 물론 서로와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삶을 영원히 사는, 온전한 조화와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주님을 외면하고 거역한 이들은 스스로 내린 결정에 값을 치를 것이다. 그게 지옥이다.

이런 복음의 진리를 잘 조합해 보면, 기독교 신앙을 통틀어 가장 공격적이고 반문화적인 주장은 동성애나 임신중절, 결혼, 또는 신앙의 자유에 얽힌 신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기독교가 내세우는 가장 공격적인 외침은 바로 복음이다.

복음을 믿는가?

복음을 믿기 전까지는 제발 크리스천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가감하거나 믿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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