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태복음 13:10-17).

그간 우리 얼마나

지금 대한민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복음화라고 이해한다면, 오늘날 한국은 철저하게 복음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화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과 그들이 이루어낸 공동체의 삶에 의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복음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써 그분의 초청에 응답하여, 세상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화란 예수님의 개입을 허용함으로써 삶의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심으로써 인격과 삶의 양식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삶과 관련된 모든 것, 즉 마음, 생각, 감정, 언어, 습관, 운명, 인간 관계, 취미, 삶의 방식과 목적, 의미와 가치, 생활양식과 문화 등 총체적인 변화와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내적인 문제이며, 삶의 본질과 관련된 깊이의 문제이며 전인적이고 통전적인 삶과 인격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이유는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다른 모든 주제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결고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 생애와 인격을 통합할 수 있는 주개념일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바른 이해

19세기 말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천국'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라는 사실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초기 전도자들은 기독교 진리를 '예수 믿으면 천당 가는 것'으로 이해했고 "예수-천당"이라는 도식으로 소개했습니다. 천국을 예수님의 재림과 이에 따르는 역사의 종말로 설명하여 드디어 그때가 되었다고 한국교회를 들뜨게 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천국 열풍도 이 핵심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비록 천국에 대한 이해는 다소 달랐지만, 그때 한 명, 두 명 천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는 '특별히 경건한 신자들'이 늘어났고, 그들에게 천국 여행담을 듣겠다고 사람들이 모여든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천국'이 한국 교회에서도 기독교 진리와 신앙의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극락', '천당'의 동의어쯤으로 생각하는 '천국'이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 나라이며, 한국에서 '휴거'나 '1992년 종말론'으로 내세웠던 '천국'이 과연 복음서를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개념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단어는 '하늘나라(천국)' 또는 '하나님나라'입니다. 이 두 단어를 장소, 즉 글자 그대로의 나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르게 변역할 마땅한 단어가 없지만 '나라'나 '땅'으로 번역하는 것부터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 나라가 하늘 저편에 있다거나, 이 세상 끝에 나타난다거나, 언젠가 인간이 사는 이 땅에 건설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일종의 추상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연상해야 합니다. 나라로 번역된 헬라어 '바실레이아'나 아람어 '말쿳'은 다스림을 받는 백성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위치, 역할, 사역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왕이시라는 사실, 왕으로서의 통치, 또한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돌보시며 구원하시는 활동 등을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공간 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기본 요소가 아닙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활동이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의 범주 안에서 표현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현장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보장 받은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왕적 권한과 활동이 100%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의 비유

사실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급적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천국에 대한 오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절반 가량은 천국의 비유라고 불립니다. 이 비유들이 직유법 형태로 "천국은 마치 ~~과 같다"고 시작하거나 은유법 형태로 천국의 개념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가까왔다는 선포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천국 복음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초기에는 전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공개적 활동이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갈 때쯤 비유의 형태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먼저 비유를 분석해야 합니다. 비유라는 표현 양식에 담긴 내용을 연구해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전하기 원하시는 천국을 비유의 형태로 가르치셨을까요? 비유의 이유를 찾으려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비유와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비유를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행히 예수님의 비유 중에는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신 이유를 밝히신 비유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갑자기 비유로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10)

예수님께서 이때 말씀하신 비유는 농부가 밭으로 나가서 씨를 뿌리는 광경으로 농사에 익숙한 청중들에게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 예수님의 권위 있는 설교를 들었고, 예수님께서 수시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약한 자들을 도우시며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광경을 보았으며, 예수님을 특별한 분으로 생각하여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몰려나와 그분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에게는 이 평범한 이야기가 오히려 이상하게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제자인 자신들은 비유를 이해하고 비유에 담긴 교훈을 발견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듯,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저희"는 제자들과 대조되는 말로서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 질문을 던진 것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무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하였나니"(1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비유의 양면적 성격을 드러냅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은 "너희"라 불리는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공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유는 알 만한 것까지 혼동을 일으키는 정반대의 역할을 합니다. 마가복음은 이 점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막 4:11)라고 좀 더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비밀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비유의 두 가지 역할, 즉 알리는 역할과 감추는 역할 중에서 더 강하게 표현된 것은 비유의 가리는 역할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2)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려서 사람들이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히고자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춘다는 단어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사람들에게도 이미 공개되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않았어도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일련의 비밀이 주어져 있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배우도록 주어지는 비유는 제자가 아닌 사람들이 더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을 그냥 따라다니는 사람들에게서 갈라놓으실 시점이 왔음을 알려 주는 비유인 것입니다.

이 시점이 오기까지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았고 체험했으며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는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분을 만난 사람은 확실히 알지는 못해도 최소한 접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픈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체험한 것을 단순한 병 고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시작되는 특별한 시기에 하나님 아들의 손을 통해 일어난 특별한 이적이었습니다.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 행사였습니다. 이전에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보고 싶어 했지만 볼 수 없었던 것, 듣고 싶어 했지만 들을 수 없었던 그런 엄청난 일들이었습니다.(1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을 보는 '눈'들을, 또 당신의 말씀을 듣는 '귀'들을 복되다고 선언하셨습니다.(16) 그런 눈과 귀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당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된 특별한 시기에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누구나 복된 위치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같은 눈, 같은 귀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전혀 다른 요소 때문에 안과 밖의 두 부류로 구분되었습니다.

비유란 예수님을 통해 이미 하나님 나라의 조각들을 체험하고 소유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분명히 알려 주는 계시의 역할을 합니다. 반대로 똑같은 체험을 하면서도 여전히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이때껏 보고 듣고 체험했던 하나님 나라의 조각마저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계속 공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어 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한 시점에 벌어지고 있었던 사건을 눈과 귀로 접촉하면서도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알리려고 사용되는 비유가 오히려 혼동을 일으키고 예수님의 활동과 교훈의 의미를 놓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비유를 사용하는 감춤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비유가 어떻게 제자들에게는 계시의 역할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은닉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비유를 알아듣게 하거나 알지 못하게 만드는 열쇠는 비유라는 표현방식이 아니라 비유를 듣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즉 비유를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예수의 제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제자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리는 좋은 도구가 되지만 이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가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었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13절에 그 이유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원인은 예수님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로 불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 차이점을 찾는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제자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채 예수님의 부름을 받거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과 말씀들을 받아들이며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고 열두 명은 사도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 나라 역시 없었기 때문에 비유로 표현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제자들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예수님과 관계된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본문 12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에서 '넉넉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되는 사람들, 곧 '없는 자'는 예수님의 비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예수님에게서 보고 들었던 것들까지도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비유를 읽으며 아무 감화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분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있을 때, 이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의 열쇠는 믿음에 있고, 이 믿음이 지향하는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 그러한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비유를 이해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바로 이해하려면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있는 자,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도달할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경고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비유의 문을 여는 길입니다. 비유로 표현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나사렛 예수와 접촉한 적 없는 사람이라면 일단 비유를 떠나 이 비유를 가르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누구이신가를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고백이 참된 고백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죽었다.

오늘날 이 땅에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들은 찾기가 어려운 현실을 바라보며 박철수 목사는 그의 책 『하나님 나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최대 주제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최대의 주제도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요, 자유의 나라요, 해방의 나라다. 하나님 나라를 모른다면 성경도 모르고 구원도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다음 가는 천당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생명과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나라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셨다. 예수님은 '몸소 하나님 나라'이시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잘 모른다. 하나님 나라는 창조의 목적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존재의 최고의 목표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최고 주제인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보니 성경과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살다가 죽으면 천당 가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기복주의와 성장주의, 성공주의에 몰입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찾아야 한다. 우선, 하나님 나라라는 낱말부터 찾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한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알 수 없다. 기독교의 실체는 하나님 나라다. 한국교회 최대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다." ( 『하나님 나라』 서문)

박 철수 목사는 하나님 나라 없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한국교회는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소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에 눈 뜬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자기를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려는 자들의 신학이다. 성경 말씀이 내뿜는 거룩한 탐조광 앞에 벌거숭이 죄인으로 드러난 우리가 하나님께 자복하고 그동안 외면했던 이웃사랑의 명령에 순복할 때 하나님 나라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김회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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