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3:18-23).

예수 없는 예수교회

『예수 없는 예수교회』는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의 책 제목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쓴 책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제목만 보아도 자동으로 움츠러듭니다. 신성한 교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 자체를 불경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오래도록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심고 가꾸어 온 열매입니다. 비단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는 영적 지도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여겨 왔습니다. 물론 그러한 복종이 가지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지도자의 말을 듣는 것은 영적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스르거나 정도에서 벗어난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조건 지도자들을 불신하거나 삐딱한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은 지도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합니다. 지도자의 사랑, 다시 말해 지도자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의 지도를 따르고 그의 말에 복종할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권위가 없는 집단이 아니라 세상과 다른 권위를 가지는 유기체적인 공동체입니다.

인간 중심의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이는 한완상 명예교수만이 아닙니다. 한종호 목사 역시 그의 책 『밀실에 갇힌 예수』에서 재력과 권력을 내세우는 목사들이 중심에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골병이 들었다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짜 예수는 밀실에 갇혀 죄수처럼 지내고 있는데, 이들이 파는 예수의 오래된 약(구약)과 새로운 약(신약)이 교회라는 시장에서 팔리고 있다. 그걸 먹으면 어찌 될까? 바로 그게 아편이다. 세상의 고난을 모르는 척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정신이 몽롱해지는 아편 말이다. 그걸 먹이고 있는 한국교회는 결국 아편장사 아닌가? 세상에 어떤 이들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지, 누가 부패한 권력으로 사심을 채우고 있는지, 어떤 부정의가 판을 치고 있는지 도무지 관심 없게 만든다. 아편에 빠진 종교인들은 결국 하나님과 대적한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모두 사탄의 편에 선다.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문제를 제기하면 불법행위라고 여긴다.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어 몸부림을 치면 과격하다고 난리를 핀다. 부자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들은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을 범죄자처럼 대한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다. 그러니 이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버릴 판이다. 도대체 우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세상과 교회 앞에서 진정한 신앙은 어떻게 해야 복구될 수 있을까?

결국 가짜를 폭로하는 일이 우선이다. 아니면 진짜를 식별하지 못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삯꾼 목자를 먼저 구별하도록 이르셨던 것 아닌가? 제 뱃속을 채울 욕심에 찬 가짜 목자들을 가려내지 못하면, 백성들은 속는다. 따라서 우리가 당장에 할 일도 가짜를 고발하는 일이다. 가짜가 판명되어야 진짜가 역사에서 주역을 맡을 수 있다. 아니면 세상은 또 다시 진짜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 것이다."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진리를 좇아 오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는 언제나 극소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모습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 흐름은 그러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왜 그렇게 존속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 비유는 가장 널리 알려진 비유이지만, 그 해석에선 아직 의견 통일이 되지 않는 가장 어려운 비유이기도 합니다. 비유의 제목에 대한 의견도 여러 가지입니다. 즉 이 비유가 '씨'의 비유인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인지, 아니면 씨가 떨어지는 '밭'의 비유인지에 관하여 토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해석은 그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씨'의 비유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이 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의 활동이 다른 결과를 낳는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밭'의 비유라면 이 비유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결과에 도달하도록 한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다루겠습니다.

네 가지 다른 장소에 떨어진 씨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농사짓는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나가서 씨를 부리는데 씨가 네 가지 장소에 떨어지고 다른 결말에 도달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농사법은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이천여 년 전 이스라엘에는 농사지을 땅이 갈릴리 지역이나 요단 동쪽 지역 외에는 없었습니다. 밭이라고 해도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농부는 그런 땅에 먼저 씨를 뿌린 다음 밭을 일구며 적당하게 사람들이 다닐 길을 남겨 놓았습니다. 씨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 혹은 좋은 땅에 뿌려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길가의 흙은 단단하여 뿌리를 내리기가 어렵고 싹이 트기 전에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버립니다.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뿌리는 나올 수 있었지만 흙이 얇아서 뿌리가 뻗지 못해 자라지 못하고 해가 돋으면 말라 죽고 맙니다. 어떤 씨는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졌습니다. 싹이 나고 자라지만 생명력이 훨씬 더 강하고 억센 가시덤불이 토양에서 필요한 양분을 모조리 흡수하기 때문에 결국 자라지 못하고 결실도 하지 못합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그 당시를 특별한 시기로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활동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도 기독교도 생겨나기 전 예수님께서 직접 살아 움직이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는 그러니까 거룩한 과거였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곧바로 예수님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시기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는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당신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당신이 해오셨던 일과 그 결과를 설명하시려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을 선포하시며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이 "천국 말씀"(19)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한 자들을 도우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신 일들 모두 예수님께서 뿌리신 씨, 곧 "천국 말씀"이었습니다. 비유를 사용하시기 전까지는 이 모든 일들이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활동을 보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제자나 믿는 자들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이날,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제자들은 아니었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적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설명하시고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같은 천국 말씀을 선포하셨고 같은 활동을 하셨지만, 그분을 보는 사람들마다 태도가 달랐기 때문에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누구든 똑같이 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누구나 예수님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그분을 좇을 수 있었습니다.

1) 길가에 떨어진 씨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면서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보고 듣기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현상에 대해 사탄이 와서 천국 말씀을 빼앗아 갔다고 설명하셨습니다.

2) 돌밭에 떨어진 씨
예수님의 가르침을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 때문에 비난과 핍박과 모욕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여 천국 말씀을 포기한다면, 그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싹이 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죽고 마는 것입니다. 결말은 길가에 뿌려진 씨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3)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세상살이 걱정과 재물의 유혹도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물질의 유혹이 너무 크고 삶의 걱정이 너무 무거워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천국 말씀이 아니라 물질과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에 비유하셨습니다.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울 수는 있으나, 끝내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4) 좋은 땅에 떨어진 씨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적을 보고 그분의 신적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듣고 깨닫는 자' 그래서 '결실'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23)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들을 규명하려면 네 번째 '좋은 밭에 뿌려진 씨'와 첫 번째 '길가에 뿌려진 씨'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듣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19) 반면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듣고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와 네 번째의 차이점은 '깨달음'입니다. 논리적으로 긍정과 부정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유에선 돌밭에 뿌려진 씨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가 나옵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정신적인 이해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일어나는 어려움이나 박해를 견디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극복하는 것임을 알려 주는 배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부리는 자의 비유에서 당신의 활동이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동시에 진정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차가운 현실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좋은 밭에 뿌려진 씨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치기 시작하신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하여 대략 오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는 약 칠십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주기적으로 방문했던 순례자들을 합치면 예수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더 많아집니다. 유월절에만 약 이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설교를 듣고, 그분의 이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열두 명, 많아야 백이십여 명(행1:15)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오백 명의 형제들을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만났을 유대인 전체와 비교했을 때 이것은 아주 미미한 숫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적은 무리"(눅 12:32)만이 예수님의 말씀이 천국 복음임을 알았습니다.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역사적 순간에 덧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우리가 오늘 귀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행적이 당시의 유대인들 대부분에게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차가운 현실을 보고 비애에 잠기신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13:9.)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고 끝내 말라죽고 마는 "생명의 말씀". 그것은 예수님이 느끼신 아픔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외침이 사람들의 메마른 마음에 부딪혀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낮추시고 아무나 끌어들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 하나님의 하한선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애는 바로 이 더 낮아질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만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가를 알려주시고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오늘날은?

오늘날은 어떨까요? 우리는 더 나은 시대를 살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많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기울일까요? "천국 말씀"이 발아해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왔다가 겉만 보고 멀어져 갑니다. 복음을 외쳐도 귀담아 듣는 이들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목회자들을 통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도 여전히 열매 없는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온갖 집회에 참석하여 "천국 말씀"을 듣지만, 생명의 씨는 발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비유를 선포하신다면 그때와 다름없는 비애에 젖으실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무리들을 그때나 다름없는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참되게 믿는 자만이 "천국 말씀"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받아 그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 비유의 핵심은 네 단계 중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에 비유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깨닫지 못함'과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천국 말씀을 받지만, 환란과 핍박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세상의 염려와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 환경을 극복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면 돌밭과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예수님의 말씀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이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되고 교회의 주인이셔야 할 예수님께서 밀실에 갇히게 된 것은 돌밭과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열매 맺는 옥토에 뿌려진 씨라고 착각하고 교회를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커지고, 많은 일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나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 예수 있는 예수교회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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