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28-40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에 코끼리와 말과 나귀가 살았습니다. 어느날 이 마구간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코끼리와 말은 아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나귀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귀담아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아기가 장차 왕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귀가 이 사실을 코끼리와 말에게 알려주자 두 짐승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덩치 크고 힘센 난 임금님의 금은보화를 운반할 거야.” 코끼리가 긴 코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난 임금님을 등에 태우고 백성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을 거야.” 말이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덩치도 작고 힘도 약한 나귀는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3년 후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동물은 바로 그 나귀의 손자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에 세 가지 봉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나귀 주인과 제자들과 나귀의 봉사입니다. 세 가지 봉사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였습니다.  한인 사회에서 말썽이 제일 많은 곳이 소위 봉사단체들입니다. 명색은 봉사인데 속에는 보상을 바라는 심리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전제로 한 봉사는 공동체에 유익보다 해악이 될 수 있습니다.

나귀 주인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제자들도 보상을 바라지 않고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얹었습니다. 나귀야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몸으로 주님께 봉사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는 정신으로 주님을 섬긴 봉사자들이었습니다.

둘째, 말이 없는 봉사였습니다. 봉사의 동기나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내 봉사를 알아 달라”고 선전하지도 않습니다.“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선뜻 내어 주고 바치고 순종한 봉사였습니다.

봉사는 작아도 말은 크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봉사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 한 마디면 모든 설명은 끝난 것입니다. 봉사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약 1:19)고 권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먼저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 지도자의 가르침 그리고 성도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제노는 “조물주가 입 하나 귀 둘을 만드신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많이 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대화란 대놓고 화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 주는 자세의 부족을 꼬집는 말입니다.

셋째,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 봉사였습니다. 유대인에게 나귀는 요즘의 승용차와 맞먹는 재산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겉옷은 의복이면서 담요, 천막의 구실도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겉옷을 가지고 오라”(딤후 4:13)고 부탁합니다. 당시 겉옷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눅 19:30)는 첫 봉사를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유대인은 첫 열매, 첫 소출, 첫 수입, 첫 자식을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해 드렸습니다(느 10:35). 첫 열매를 바친다는 것은 성스러운 봉사 정신의 발로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런 봉사자의 표본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하시고 그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사는 성도에게는 대가도 말도 없이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바칠 확실하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공동체가 잘 되려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말없이 소중한 것을 희생하는 봉사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도, 사회도, 교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참된 봉사의 정신이 아쉽습니다. 참 봉사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바른 봉사의 자세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더 부흥하고 세상은 더 살 만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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