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태복음 13:44).

다른 천국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했던 천국은 그들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과 헤롯 왕가의 멸망,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회복, 신정정치로의 복귀 그리고 기존 역사의 종말 등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대 변혁적 사건을 의미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적 개입이나 그 일을 대행할 모세나 다윗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며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사람들은 이런 천국을 생각하면서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 자체도 그러한 종말론적 색채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천국은 다가오는 진노를 뜻했습니다(눅 3:7). 그는 자신의 때를 나무꾼이 휘두르는 도끼가 나무뿌리 부근에 막 닿은 것처럼 긴박한 상황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급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곧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했습니다(눅 3:9).

얼마 후 그의 설교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바뀌지만, 심판과 관계된 긴장된 분위기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b-17).

하지만 세례 요한이 예고했던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그가 예언했던 종말론적 사건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눈에 보이는 종말도, 심판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 가까이 와있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활동을 시작하셨지만, 세례 요한과 달리 그분은 종말과 심판이 아니라 은혜와 용서의 해, 곧 희년을 선언하셨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예수님께서는 준엄한 심판을 하시지 않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기준으로 삼을 때,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면 메시아는 이미 오셨고 천국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예언한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면 종말과 심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신 분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예언한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답답했고 예수님을 의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에도 예수님이 과연 자신이 예언했던 그 메시아인지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직접 질문을 하였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이 질문은 세례 요한만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며 가졌던 의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춘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랐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당장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보고 들은 것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신들의 천국관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잠깐 그 실현이 늦어질 뿐, 그날이 오리라고 여전히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기다리거나 요청했던 천국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동시간적 사건으로 결합되어 있던 메시아의 오심과 심판을 두 사건으로 분리하고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사이에 아무도 알 수 없는 시간 간격이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천국관을 교정하시고 당신의 하나님 나라를 알리시기 위해 애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작은 씨나 누룩에 비교되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기존의 천국관을 버리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머릿속에서도 천국이란 최상의 장소요, 결핍이 없는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곳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것을 배제하고 모든 최상의 것들로 넘치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에게도 가히 충격적입니다. 기대하고 열망하던 좋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천국관 역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천국관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부활을 목격하기 전까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종말론에 휩싸이거나,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교리 중심의 '지적인 동의'가 믿음으로 이해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를 특별히 종말과 관련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시들한 인기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셨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베들레헴 태생의 목수나 나사렛 시골 출신의 시골뜨기에서 시작했으므로 누구에게나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런 시각으로 판단하며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미미한 시작 때문에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조급함과 교만이 만들어내는 실수요 오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작게 시작해서 조금씩 자라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알리시고자 밭에 숨겨진 보화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깨닫기 어려웠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에게 다가왔다가 그냥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홀히 여김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놓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고 있다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천 년 동안 감추어 오셨던 비밀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런 상황을 떠올리며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2)라는 말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수님의 입을 특별히 강조한 것입니다.

그때는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교훈이 그런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는 기적을 보면서도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귀중한 분으로 영접 받지 못했습니다.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 동족의 푸대접, 무시와 무관심은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겨자씨처럼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허술한 태도를 지적하시면서 동시에 미미한 시작 때문에 놓치기 십상인 귀중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똑바로 직시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밭을 소유한 농부가 아니었습니다. 남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거나 품팔이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밭에서 일하다가 땅에 보화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땅에 보화를 묻어두는 것은 당시로서는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은행의 비밀금고나 귀중품 보관소가 곳곳에 있는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 보물을 보관하는 가장 안전한 장소는 자기 소유의 집 뜰이나 밭이었습니다. 혼자만 아는 곳에 몰래 묻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파내서 쓰는 일은 널리 퍼져 있던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인이 불행을 당하면, 보화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기에 보화의 주인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후에 그 밭을 소유하는 사람 역시 보물이 숨겨진 것을 모르기 때문에 보화는 여전히 주인 없는 상태로 묻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자기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밭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주인 없는 보화를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누가 볼세라 얼른 흙으로 다시 덮어두고 돌아와 모든 재산을 팔아치우고, 그 밭을 통째로 사버립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돌아가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샀다는 행동에 있습니다. 그는 밭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보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밭에 감추어진 보화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팔아서 기꺼이 선택할 보화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토대로 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관한 이야기는 곧 예수님 자신이나 당신을 믿는 믿음의 가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교훈하셨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화의 비유는 예수님과 사람들이 맺은 긍정적인 관계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리시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추어져 있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숨겨져 있는 보화에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가 당시의 종말론적 천국관을 따라 예수님의 활동과 인격을 저울질해 볼 뿐, 눈에 보이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하나님 나라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숨겨짐'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누구에게나 공개하시고 아무나 찾을 수 있도록 무방비상태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부터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만 시내 산에 오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은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사람들의 속에 있다는(롬 1:19) 바울의 진술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새 시대가 열렸지만,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사역의 이러한 특징은 조금도 변하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속 사역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도 모두에게 가려져 있습니다. 숨겨져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비로소 그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밭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 위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같은 날 열심히 일하다가 우연히 그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샀다는 그 사람처럼 네 사람은 배도, 아버지도, 생업도 뒤로 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 함께 참여하는 것임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열망하는 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표는 예수님의 삶과 의도에 매여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작은 말 한 마디에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따라나선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세상은 처음 만들 때나 다름없이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한 시점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망치질하던 목수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알려진 것 같으면서도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고 계셨을 때, 망치를 팽개치고 활동을 시작하셨을 때,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을 때,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여 거대한 나무가 된 지금도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제 보화처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손에 넣어야 하는 값지고 귀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것이 밭에 감추어진 보화 비유가 주는 교훈입니다.

진짜 보화인가?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알아보자마자 가서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샀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라는 말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귀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의 그 절절한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 혼란과 무질서의 세계, 돈과 명예의 광란이 일고 있는 지구촌 어딘가에 보화가 묻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와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작은 흐름이지만 면면히 흐르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우리 가운데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둘러싼 모든 인위적 허울들을 벗겨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내보일 수 있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예수의 이름을 팔아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우리는 모든 소유를 다 팔아 하나님 나라를 샀는가? 아니 사고 싶어 하는가? 정말 모든 소유를 포기할 수 있는가? 이것만은 안 된다고 꼭꼭 숨겨 놓은 다른 보물은 없는가? 우리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를 들으며 이런 질문들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보물들을 너무나 많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돈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드는 사기극이 신앙의 이름으로 진지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이라고 거룩하게 포장된 도로 위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돼지우리에 떨어진 진주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요구합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야 합니다. 소유가 많은지 적은지는 문제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닫고 모든 소유를 기꺼이 다 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손에 넣고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도 함께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의 비유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와 부모, 집과 부와 명예와 권세, 이기심과 자만심, 욕심과 야망,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버리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기준은 한 번도 완화된 적이 없습니다. 힘을 거머쥔 거짓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무리 면죄부를 남발할지라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역시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그분을 좇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는 곧 우리가 가장 값지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는 곳입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는 우리의 삶을 재는 저울추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분명한 태도를 표명할 것을 촉구합니다.

종말의 백성

밭에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를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팝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아보고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사려는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종교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무시무시한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전쟁이나 지진, 기아 등, 재앙이 들이닥쳐 순식간에 세상을 끝장내는 어떤 현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그런 재앙이 들이닥치는 무시무시한 시간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그런 재앙이 끝나는 기쁜 시간입니다.

종말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알리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고통과 죽음이 다스리고 있는 이 세상 한가운데 와 있음을 알려 줍니다. 종말은 새 인간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종말은 마지막을 알리는 두려운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종말을 희망을 알리는 때보다는 말세를 알리는 무시무시한 시간으로 여기게 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종말에 대한 오해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절망과 불행을 수없이 겪으며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경제와 질서의 문제로 착각하지만, 그것은 경제와 질서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방식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어리석어 보이고 말도 안 되어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본질이며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못 박는 종말론적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태선, 『종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종말의 백성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포기하지 못할 일이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채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참된 의미입니다.

종말이라는 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세상은 그에게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시고 복음을 살면서 영원성을 체험합니다. 그는 오늘 용서하고, 오늘 희생하고, 오늘 사랑하고, 오늘 평화를 심는 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희망이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복음으로서의 복음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말하는 바의 종말론적 신앙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진정한 행복과 희망을 전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것임을 발견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밭에 감추어진 보화임을 깨닫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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