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유혹은 휘파람 소리보다도 맑고 시원했다. 유리창을 통해 나를 불러내려는 파란 하늘과 포근한 햇빛의 눈짓이 보였다. 나뭇가지를 쓰다듬듯 연하게 부는 바람까지 합세했다. 가슴을 간질이기에 충분했다.

난 오전 내내 하늘과 햇빛에게 슬금슬금 곁눈질로 응대했다. 마치 흠모하는 사람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눈길같이 은근하고 끈끈하기까지 했다. 점심 후 한참이 지나서야 급한 일이 마무리되었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챙겨 썼다. 병아리 빛의 엷은 스웨터를 걸치고 그 유혹을 좇아서 밖으로 나갔다. 막혔던 숨이 확 트이는 듯했다.

자주 걷는 길, 차가 조금 뜸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오래 된 동네라서 나무들이 울창했다. 고목이라 할 수 있는 참나무가 미슬토(mistletoe, 겨우살이)를 달고 있는 가지들에게 작고 연한 잎들을 부지런히 만들어 입혔다. 겨울 동안 죽은 듯한 검회색 나뭇가지 중간 중간에 건강을 과시하며 녹색의 축구공 크기로 붙어 있었던 미슬토. 가지의 연약함과 초라함을 강조하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에 눈을 돌려버리곤 했다. 아릿아릿하고 연한 잎을 달고 있는 가지는 미슬토를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이 있음을 확인하게 했다. 겨울을 이겨낸 승리의 표였다. 잘 지냈다고, 살아 있다고 살랑살랑 가지를 흔들었다. 염려해 준 마음에 답하려는 듯 말을 걸어왔다. 그들의 행복한 봄 인사에 얼굴 가득한 웃음으로 답을 해주었다.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잔디밭 한쪽이 낯설게 다가왔다. 방석만한 넓이의 잔디들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은은한 보라색 빛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입이 크게 벌어졌다. 보랏빛 잔디를 처음 봤다.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한 부분을 점령해 버린 풀들은 침략자의 기상을 버렸나보다. 잔디 사이로 조심스레 몸을 숨기고는 한꺼번에 연보라색의 꽃들만 내밀고 있었다. 잔디에 나타난 연보랏빛의 정체였다.

작았다! 참 작았다. 얼마나 작은지 엎드려야만 눈에 들어왔다. 꽃들에게는 괴물로 느껴질 만큼 큰 내 검지를 펼쳐보았다. 꽃 열 개를 합하여도 검지손톱 덮기에 턱도 없었다. 작은 꽃들은 의연했다. 거침없는 손가락이 일으킨 바람에 잠시 흔들림이 있었을 뿐 바로 평정을 찾아버렸다. 활짝 웃으며 하늘을 향해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고고하고도 도도했다. 네 개의 꽃잎을 갖고 보일락 말락 꽃술까지 달고 있는 그 모습은 참 섬세했다. 선명한 모습은 크고 화려한 색의 어떤 꽃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으려는 듯 당당했다. 잔디 사이에 몸을 숨기고 슬며시 꽃을 올려 보내는 풀의 본체와는 다르게 야물었다. 머리카락 한 올 허락하지 않고 참빗으로 빗어 넘긴 그림 속 여인네의 모습보다도 깔끔했다. 내 마음을 끌어가는 무언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단박에 작은 꽃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취해 어쩔 줄 몰랐다. 엎드려서 눈은 꽃들을 바라보며 머리로는 그 매력의 근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사명이 있는 생명은 당당할 수 있으리라! 내 눈앞의 풀꽃들도 뭔가 사명이 있으리라. 풀꽃의 사명은 생명을 전달하는 일이리라. 어딘가에서 풀씨로 날아와 잔디밭의 작은 귀퉁이를 점령한 이 군락지에서 이들이 펼쳐 내야 할 사명은 받은 생명을 퍼트리는 일이다. 작게 받은 생명이니 작은 그대로 전파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작은 사명을 들고 묵묵히 나아가면 군락지를 채우고, 넓은 밭을 만들고 숲을 이루리라. 생태계의 한 부분이 건강해질 것이다. 하찮은 일처럼 보이나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일조를 할 것이다. 귀하고도 소중한 일이다. 도도하고 고고하며 의연했던 매력은 그곳에 뿌리내림으로 말미암음이었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의 눈에 뜨이는 것은 고사하고 느낌이나 건넬 수 있을까? 내 일생, 몇 십 년의 시간이라는 줄에 오늘이라는 순간은 얼마만한 크기로 기억된단 말인가! 실로 미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 안에 주님주신 생명을 나누는 사명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내 눈에 비친 들풀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안에 모든 것을 넣어 주신 주님의 섬세함 따라. 크고 화려한 꽃들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이 흔들어도 도도하고 의연하게, 작을지라도 이 순간에 주어진 내 몫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잡아봤다. 들풀의 매력으로 인해 그 안에 넣어두신 의미를 읽어 낸 기쁨이 몰려왔다.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자세는 분명 작은 꽃을 관찰하기 위함만이 아닌 듯싶었다. 정녕 풀꽃 안에 깊은 의미를 넣어두신 그분의 손길을 따랐음이리라.

하늘과 햇살과 바람을 통해 보낸 휘파람보다 맑고 시원했던 유혹의 소리는 야무진 보랏빛 작은 풀꽃들의 합창이었다. 그 유혹에 넘어가길 참 잘했다. 풀꽃의 모습을 통해 거대한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 있는 나와 내 일상을 읽어낸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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