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8)

회복기에 이사야서 후반부에 제시되어 있는 약속은 성취되지 않았지만,

1) 고레스의 칙령은 그 약속의 성취의 시작이었다. 그는 지배 지역의 풍습을 관례적으로 유지하고 피지배 민족들의 신을 존중하였다. 토착 지도자들을 신뢰하였으며 무자비한 억압 정책으로 점령국의 국민 생활을 파멸시키는 조치도 취하지 아니하였다. 피지배국의 국민들과 바벨론 백성들은 그를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2) 유대인들은 이미 바벨론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었으므로 고레스의 귀환 조치는 민족적인 면에서는 기뻐할 일이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이민생활의 모든 관계를 포기해야 하고 고난과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던 성전의 기초가 놓여지고(B.C. 538년), 건물이 완공되기까지 20년 넘게 걸렸다, 성전 건축에 대한 이웃들의 방해가 있었으며, 건축이 중지되어 방치되다가 주전 520년에 학개와 스가랴의 열렬한 권면으로 공사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4년 후에야 비로소 완공되었다.

3) 성전은 완성되었으나 유대 공동체의 사기는 위험스러울 정도로 저하되었다, 그들은 자기 일에 분주하여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푸념을 하였다, 이방인들과 통상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느 13:16) 이방인들과의 통혼도 더욱 빈번하게 되었다(스 9:1-4).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크게 우려하였다(느 13:23-31, 스 9-10장). 잡혼은 이스라엘의 종말의 전조처럼 보였다.

4) 이스라엘 왕국의 후반기에 심해진 소망에 대한 실망, 풍기문란 그리고 이방에로의 지속적인 동화와 더불어 고난의 종의 세계 선교에 대한 이상이 불투명해졌다. 유대교는 세계 선교의 종교가 되지 못하였다. 개종자들을 혈통적 유대인의 수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강렬한 반감이 있었다. 이런 풍토에서 고난 받는 종의 사명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였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종 자체에 대한 감정과 그 종의 사명인 선교는 회복기 이후의 초대 교회가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유대인들의 편견이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이후에 예언은 점차 사라지고 묵시 문학으로 알려진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안에서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다윗의 왕국)를 믿는 신앙(유대교적 관점)이 표현되었다.

1) 포로기 시대와 그 이후에 경건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주도하였고 유대교가 되었다. 포로기 이후의 이 유대교는 율법 공동체가 되었다. 유대인은 할례의식을 치름으로써 언약 안에서 그 구성원이 되었음을 표시하고 특별히 안식일의 율법을 지키도록 강조되었다(예, 사 56:2,4,6). 이렇게 묵시 문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쪽에 서서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강조되던 시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왕국의 왕으로 (1)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2)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 (3)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4)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여러 성품을 가지신다는 것이다.

2) 거룩한 국가 공동체를 형상화하는 데 누구보다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학사 에스라였다. 그는 모세의 율법책을 끼고 있었고 마음속으로 개혁을 다짐하고 있었다(스 7:10, 느 8:1). 그 개혁은 유대인의 정체성(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방인과의 분리로 특징지어진다. 백성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그들이 히브리 말을 잊어버린 것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고 에스라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켰고 이미 결혼한 사람들에게 헤어지도록 명령했다(스 10:2-5). 율법을 지키는 자가 참된 이스라엘의 구성원이다. 이렇게 거룩한 국가 공동체가 수립되고 유지되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율법은 급속도로 번창하였다. 율법은 영원부터 하나님에 관해 규정된 것이라고 주장되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진술하였다고 주장되었으며 율법을 어기는 것은 죽음과 방불한 이단으로 규정될 수 있었다.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순종이었다. 그러나 지극히 비대해진 율법은 누구나 통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