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태복음 13:51-52).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우리가 흔히 듣는 말입니다. 아멘은 만병통치, 도깨비 방망이가 되었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아멘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구원 역시 아멘이 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네 되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과연 그렇게 구원이 간단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지 지적인 동의로 완성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잘못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도 단순히 교리에 동의하고 세례 받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기독교가 축소 환원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서기관 비유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지금까지 다룬 비유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란 좋은 씨와 가라지,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 의인과 악인,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의 판별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구조와 관련하여 이 질문은 우리가 다룬 비유들이 수록된 마태복음 13장 전체의 주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끝에서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49-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로 규정하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행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문자적으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로 선언하신 정황만을 근거로 삼으면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셨던 하나님의 뜻이란 당신을 향한 믿음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앞에서 확인한 대로 13장의 출발점입니다. 믿음은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하는 밑바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성 때문에 곡식과 가라지 혹은 그물의 비유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아듣고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가라지가 있고 못된 물고기가 있다는 것이 언뜻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의 답을 오늘 본문이 제시해 줍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먼저 이 문제를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인자는 세상에 좋은 씨, 즉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을 뿌렸습니다. 잠시 후에 인자의 원수가 와서 같은 밭에 가라지, 즉 악한 자의 아들들을 덧뿌렸습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그 출발점, 곧 정체성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해석에서는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근거로 심판이 진행되지 않고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가 "의인"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이들에게 영벌이 선언됩니다.

문맥으로 보아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유무로 심판이 수행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곡식과 가라지의 '열매'가 문제시 되고 있습니다. 열매의 유무, 의나 불법, 넘어지게 하는 것 등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 그래서 눈에 드러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런데 곡식의 근원은 인자에게 있고 가라지의 근원은 원수에게 있다는 예수님의 설명은 눈에 보이는 여러 현상의 이유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절대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열매, 의, 불법이 아니라면 곡식인지 가라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곡식은 예수님께서 뿌리셨고 가라지는 원수가 덧뿌렸다는 사실은 직관이나 직통 계시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혹은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경험적으로 도달하는 것임이 명백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 설명에서는 정체성이 아니라 현상, 즉 열매들이 심판의 근거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열매라는 현상을 통해 나무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것에 의해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자가 뿌린 좋은 씨는 곡식을 맺는 데 비해, 원수가 뿌린 가라지는 당연히 곡식을 맺지 못하고 다른 열매를 맺기 때문에 의나 불법이란 열매는 인자가 뿌린 좋은 씨 또는 원수가 뿌린 가라지라는 정체를 알려 주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이 불법이고, 악이요, 무엇이 의이고 선입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이 둘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누가 무슨 법을 거스리는 자요, 누가 어떤 의를 행하는 의인입니까?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 척도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아무런 답도 할 수 없다면 열매를 보고 가라지를 구분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비유는 아무런 교육적 효과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는 말씀이나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말씀 역시 아무 의미도 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물의 비유

이제 그물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물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어입니다. 따라서 그물 안에 걸려든 각종 물고기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을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로 가르는 심판의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구나 소유해야 할 가장 값진 것인데 하나님 나라 그물 안에 갇힌 물고기들을 다시 구분하는 과정이 왜 필요한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 안에도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섞여 있기 때문에 의인들 가운데서 악인을 골라내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섞여 있는 상태를 세상이나 교회라고 부른다면 그래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바다에 던져진 그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전제가 깔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들을 잡는 그물과 같다면 이 하나님 나라 그물은 아무나 마구잡이로 끌어 모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그물에 물고기들이 걸려들었다는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닌다거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그물에 걸려들었다면 그대로 영원한 영광이 선언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물에 걸린 각종 물고기들을 다시 나누고 있습니다. 나누는 근거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와 같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만들어내는 결과, 즉 의와 악, 의로운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라는 현상을 근거로 심판이 진행됩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와 긍정적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다시 법정에 서서, 자신의 운명을 선언하실 인자의 입술을 주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심판대는 영생과 영벌을 선언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안도감도 줄 수 없다는 뜻일까요?

믿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냐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대답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할수록 사람들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그분의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자칫하면 개인의 삶을 정체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경향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순수이론의 형태가 아닌 삶의 차원에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멍에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소 두 마리를 사용했습니다. 두 마리 소를 연결해 주는 것이 멍에입니다. 바깥쪽에는 힘세고 경험이 많은 소를 안쪽에는 힘이 약하거나 어린 소를 두었습니다. 안쪽의 소는 바깥쪽 소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바깥쪽에 계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미하신 하나님의 뜻은 믿음으로 당신에게 오는 것이며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이나 감성의 영역에서 도덕적 활동이 없는 정신 현상의 하나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환란과 핍박을 견디고 유혹과 염려를 극복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삶으로 표현되는 변화만이 그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시금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우리의 삶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믿음과 행위가 함께 갑니다. 삶이 예배가 되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그 믿음이 바로 예수님의 비유들을 관통하고 있는 전제이며 동시에 주제입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믿음의 개념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출발점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근원을 도외시한 채 '삶의 열매', 즉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 문제를 심판과 연결하였습니다. 그물의 비유는 모두가 믿음을 가졌다고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는 그물 안의 물고기들에게 의인과 악인을 나누는, 다시 말해 영벌과 영생을 나누는 심판을 적용하였습니다.

이 두 비유의 심판 장면은, 믿음이란 포괄적인 개념이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전인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고,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분의 통치가 우리의 삶 모든 곳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의식을 넘어 무의식까지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자신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두 비유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좋거나 나쁘다, 혹은 의롭거나 불의하다고 하는지, 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지식과 감정으로만이 아니라 의지와 삶이 더해진 전인적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란 과연 무엇인가가 풀어야 할 숙제인데 그 답이 바로 하나님 나라 서기관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서기관

하나님 나라의 서기관의 비유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앞의 비유들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는 가깝게는 그물 비유, 멀게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의 논리적 결론입니다. 이 비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든 비유를 깨달았다는(51)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어떤 기준에 의해 옳고 그름, 의와 악을 판단하시는가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입니다.

이 비유에는 두 가지 이질적 요소가 하나로 뭉쳐져 있습니다. '새 것'과 '옛 것,' '천국의 제자'와 '서기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제자가 된 모든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서 비유를 듣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제자들에 대한 비유임이 명백합니다. 이 표현을 비유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한 번도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서기관이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를 옛 직업으로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비유들은 직유였는데 이 비유는 은유입니다. 다른 비유에서는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와 관련지어 이야기하셨지만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역할을 일러주시고자 이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서기관은 하나님의 율법을 베끼고, 가르치고, 해석하고, 보전하던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율법의 외형적 전수가 주된 일이었으나 후에는 해석과 적용에도 관여했고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서기관에 비유하신 이유는 서기관들이 하던 일과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연결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 설명하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집주인에 비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과 어느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묵은 곡식이 떨어지기 전에 새 곡식을 저장할 정도로 여유 있게 살았습니다. 집주인은 창고에 묵은 곡식과 새 곡식을 쌓아 놓고 적당히 섞어가며 양식을 소비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새 것'과 '옛 것', 햇곡식과 묵은 곡식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되자 열두 명을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만이 목자로서 가르치고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필요한 일들을 보조적으로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전혀 모르던 시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서기관 비유에서 그들이 서기관들처럼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일러주셨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새것과 옛 것을 서기관이란 은유와 결합할 때 나타납니다. 서기관들의 주 임무는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며 다음 세대로 전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서기관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듣고 이해한 사람들로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새것만이 아니라 서기관들처럼 옛 것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려 주는 기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도구였습니다. 선지자들 또한 이스라엘에 무엇이 옳은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그들의 역사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배우고 가르치고 보전하고 해석하며 전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율법, 예언을 재해석하고 적용하며 보전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이 되었으므로 묵은 곡식에 대한 임무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는 햇곡식, 예수님의 교훈들을 함께 가르치고 해석하며 적용하고 전달할 임무를 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시키셨습니다(마 5:17-20).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의 통치에 굴복한 제자들은 완성의 의미를 설명하고 완성된 율법을 예수님의 교훈과 함께 다른 민족들과 후대에 전달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 특히 하나님 나라라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이 가지고 있어야 하고, 따라야 하고, 삶을 늘 조율해야 하는 기준 음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마지막에 오실 인자가 의인과 악인,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해 내실 바로 그 기준입니다. 우리는 기준도 없이 값싼 은혜에만 의존해 공짜를 바라는 한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고귀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은 곧 하나님의 사역임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 백성들 개개인의 사명인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그것을 분명하게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 복음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지적인 동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 훈련 안 하는 교회가 없지만 제자들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교리와 신조에 대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은 모두 변화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성육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삶 속에서 육신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보고,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음을, 그것이 바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릴 때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사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 변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의 육화로 드러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으로 변화될 때 그것이 바로 신앙이며, 그것이 곧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구원을 바라본다면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셈입니다. 그래서 속 사도인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히 살아 있는 인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복음화와 교회 개혁을 원한다면, 신앙은 믿음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변하는 것이어야 함을 새롭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서기관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서기관(율법학자)이 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율법과 이스라엘의 전승과 역사에 정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복음과 기독교 전승과 역사에 대해서도 그래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점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새 것과 옛 것을 곳간에서 내어올 수 있습니다. 집 주인이 되어 적재적소에 그것들을 활용하고 공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 오는 새 것과 옛 것에 따라 우리들 자신의 삶이 먼저 조율되어 있어야 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같이 보이지만 그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멍에는 가볍습니다. 그분과 동행하는 길은 힘겨운 고행 길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참된 쉼이 있고 생명이신 그분으로부터 공급되는 생수가 있기에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명의 역사로 풍성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서기관이 되어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우고 그분과 동행하며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밭을 기경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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