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 20:1-16).

상급론과 오늘날 기독교의 천국 이해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상의 신학' 혹은 '상급론'을 암묵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구원은 모두가 똑같이 받지만 천국에서의 상급이 다르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교인들이 상급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듭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천국 중심가에 있는 커다란 '맨션 아파트'에 살게 되고 신앙생활을 시원치 않게 한 사람은 변두리에 있는 '학고방'에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황금 면류관을 쓰고 어떤 사람은 개털 모자를 쓰게 될 것이라는 비유도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식 상급론은 성경이 한국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며 탄생된 한국의 토속적 신학 주제입니다. 인간의 노력을 구원의 공로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천국에서의 더 큰 영광, 더 큰 상급과 연결시킵니다. 천국에 부끄러움이 있다고 합니다. 상급을 받을 만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급론이 아무 저항도 없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욕망과 이기심을 자극하여 경쟁을 유발함으로써 충성심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목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경험하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만일 하나님 나라에 차별과 부끄러움이 존재한다면 천국은 이 세상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상급이 주어지는 천국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선진국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상급론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의 천국 이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배경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비유의 배경이 되는 19장 전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3-15절에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안수하시며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라고 선언하신 사건이, 16-22절에는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것인가를 질문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청년의 대화에서 영생을 얻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대체됩니다. 23-24절에서 다시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영생, 천국, 구원은 같은 의미입니다. 이 주제는 베드로와의 대화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좇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또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약속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천국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천국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적극적인 동반자입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역에 응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비유를 마무리짓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

또 다른 배경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역사적 상황과 당시의 메시아 대망 사상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때는 예수님의 사역 중 마지막 순간이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야 한다고 예고해 오셨던 대로 그 순간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이 즈음에는 제자들의 신앙과 정신도 예수님의 사역 초기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했을 뿐 아니라 그분을 경배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자주 '종말'이나 '이별' 등의 말들이 나오고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루살렘이 점점 가까워지자 그들은 흥분과 기대로 들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수난, 죽음, 부활을 이 세상의 종말, 즉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천국의 출현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까지도 천국을 종말론적인 시간과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했음을 성경은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세계에 군림할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큰가, 천국에서 누가 높은 자리를 얻게 될 것인가 하는 논쟁을 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어떤 집주인에 비유하셨습니다. 우선 유대인의 시각을 따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과는 대략 여섯 시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비유에 나오는 3시는 오전 9시, 6시는 정오, 9시는 오후 3시, 그리고 11시는 오후 5시에 해당합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구하려고 새벽같이 인력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쓸 만한 품꾼들을 물색해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오전 9시, 즉 아침에도 장터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이들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두 번째 경우, 그들이 일없이 놀고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주인이 그들을 돕고자 일자리를 제공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인지 주인은 임금을 정하지 않고 정당한 보수를 주겠다고만 했습니다.

주인은 정오에도, 오후 3시에도 품꾼들을 고용합니다. 별다른 설명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두 번째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오후 5시에도 시장에 갔습니다. 시장에서 하루 종일 놀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포도원 주인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무도 품꾼으로 써주지 않는 게 이유였습니다. 주인은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걸 알면서도 이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저녁이 되어 품꾼들이 일을 끝내고 품삯을 받으려고 포도원 주인과 청지기 앞에 모였습니다. 주인의 명령으로 청지기는 마지막으로 불려 와 한 시간 가량 일한 품꾼들부터 삯을 지급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다른 일꾼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만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자신들은 도대체 얼마나 받을지 기대에 부풀어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습니다. 품꾼들의 기대는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더위와 싸우며 하루 종일 노역을 한 우리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똑같이 취급하는가?' 불평을 쏟아놓은 사람들은 새벽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주인대로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으니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늦게 온 품꾼들에게 얼마를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한 데나리온은 잘못이 아닙니다. 포도원 주인은 새벽부터 일한 사람들이 이 문제로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품삯을 지급한 것은 순전히 주인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자기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자기 것으로 선심을 베풀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행동이 선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열두 제자에게 하신 비유

포도원의 주인이 품꾼들을 부르신 것처럼,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의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특수하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주인의 동정심과 자비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부르신 것과 다른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분명히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대하시는 태도는 달랐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는, 즉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들이 첫째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 상황에 연결해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온 품꾼들로 열두 제자들을, 그 후에 온 품꾼들로 열둘 이외의 제자들을 비유하셨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나 목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관계를 맺든, 하나님께서는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진 종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취급된 내용입니다. 하지만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았음을 증명할 때에는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확인됩니다. 이것이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말하려는 것입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았습니다. 땀 흘리며 수고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박해와 고통을 견디고 온갖 어려움을 참으려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석양이 지는 포도원 입구에서 모두가 삯을 받으려고 줄을 섭니다. 가라지는 이미 다 골라내어 불 아궁이에 던져졌습니다. 못된 물고기는 다 골라내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만이 줄을 서서 포도원 주인을 만나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가진 이 종말론적 분위기는 이 비유의 배경이 되는 19장 끝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새 세상에서의 열두 보좌를,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에게는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열두 보좌란 열두 사도가 앉게 될 예수님 주변의 권좌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에도 위계질서가 있어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더 위대해지고, 더 큰 상을 받는다는 말일까요?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는 그것이 당연하고 공평합니다. 세상에서의 공평함이란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의 최초 목격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부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분의 설교를 듣고 기억해 두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이 퍼질 수 있게 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그들의 기대가 잘못된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열두 보좌를 약속받은 열두 제자들을 훈계하시고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받은 것만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감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온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그는 꼴찌가 됩니다. 꼴찌로 왔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는 첫째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며 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고, 감사와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다양한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고 관용과 용서와 양보와 희생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예수님께서 원하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과는 원리부터 다른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마음에 달려 있고, 이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감염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형제애를 지닌 사람들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른 이의 행복이 내 행복보다 더 행복하기에 시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고통이 내 고통보다 더 아프기 때문에 그 고통을 대신 지고자 합니다.

우리는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떨까요? 교회와 전통, 성직과 신학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권위를 조장하거나 묵인하고 있습니까? 종교적 기득권이 오늘날 교회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인정되고 있습니다. 먼저 된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큰 소리 치는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앞자리에 앉는 것이 공공연하게 허락되고 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도록 허용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와 방식이 하나님 나라이어야 할 교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상식, 통념, 관습, 전통, 체면 등이 복음을 왜곡하고 심지어 가리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헌신과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과 종교적 생존경쟁이 교회 안을 활보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기독교적 색채를 띤 이기심과 자만심, 영웅심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것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한 데나리온에는 주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그 한 데나리온은 하루치의 품삯이 아니라, 날마다 내리던 만나와 같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징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경쟁과 야망과 질투와 시기의 나라가 아닙니다. 불평과 원망의 나라가 아닙니다. 은혜와 감사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오래된 관습과 가치, 관념들을 깨는 새로운 질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능력을 나타내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들을 산산이 부숩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 역시 그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세상의 나라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힘을 가지고 있는 세상은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부활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이 어떻게 높여지는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선 많은 것들이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역설과 아이러니, 놀라움 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가 됩니다. 부도덕한 사람들이 용서를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어른이 아이처럼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경건한 자들이 저주를 받습니다. 모든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되지 않습니다.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바로 이런 나라로 초대합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우리의 관점과 삶의 방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에서의 성공과 소유가 가슴을 뛰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어리석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이요, 유대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을 알고 믿게 된다면 우리의 신념(belief)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behavior)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소속(belonging)이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달라진 삶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상급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며 감사와 은혜로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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