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2-14

혼인잔치의 비유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자 임금은 거창한 혼인잔치를 계획했습니다. 잔치에 초대할 사람들을 정하고 날을 잡았습니다. 착오가 없도록 미리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결혼식 날이 다가오면서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었습니다.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이 충분히 준비되었습니다. 소도 잡고 양도 잡았습니다.

임금은 아들과 함께 차려입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종들을 보내어 손님들을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종들은 예상 밖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손님들이 오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당황한 임금은 다른 종들을 보내 소도 잡고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어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손님들은 각자 자기 일에 바빴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갔고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러 떠나버렸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함께 웃고 즐겨야 할 아들의 잔치가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후에 임금은 아무나 초청하여 잔치 자리를 메우라고 종들을 거리로 내보냈습니다. 왕자의 혼인잔치가 시장처럼 변했습니다. 종들은 밖에 나가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혼인잔치이기에 사람들은 기꺼이 초대에 응했습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리지 않고 모두를 불러들였습니다.

뜻밖의 기회를 얻은 사람들은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임금의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혼인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인이 마련한 예복을 입는 것이 당시 팔레스타인의 풍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입었고 또 어떤 이들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준비된 예복을 입지 않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마침내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연회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임금의 눈에 띄었습니다.

조건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 오게 했지만 준비된 예복마저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임금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도 왕은 그를 친구라고 부르며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임금은 그 수족을 결박하여 어두운 곳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슬피 울며 후회하였지만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었습니다.

해석

마치 한 편의 단편소설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성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초대 받은 사람들이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실각할지도 모르는 임금에게 잘 보이기보다 다음 왕을 고려해 몸을 도사릴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서기 6년,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유대지역의 분봉 왕으로 있던 헤롯 아켈라우스를 파면시켜 달라고 호소하며 로마 총독이 유대 땅을 지배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십 년 동안 헤롯 왕가의 싸움, 전통 가문과 신흥 귀족계급 간의 세력 다툼, 그리고 로마 황실과 원로원의 싸움에서 어느 편에 붙느냐는 문제로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혼인잔치는 포도원과는 다른 비유입니다. 앞에서 다룬 여러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나 새로운 백성을 모두 포도원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즉 새로운 한 집단이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었던 포도원을 물려받은 것으로,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것을 넘겨받는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이스라엘은 초대를 받고도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러자 길에 있던 누구나 초청을 받았고, 초청을 수락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누리지 못한 혼인잔치에 참여합니다. 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 내쫓아 혼인잔치에는 예복 입은 사람들만이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실패를 알리시고 구약시대에 그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축복을 재해석하십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에 주어진 특권이란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라고 초청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칭호는 영원한 축복의 보증서가 아니라, 기회가 올 때 앞장서서 하나님의 잔칫상에 앉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에 들어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초청장을 잊고 세상일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잔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주어졌던 특권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에 무감각해진 이스라엘을 향해 "청함을 받은 이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 말씀하시며 그들을 포기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초대 받았지만 뽑힌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신 하나님께서는 막 시작되려는 혼인잔치를 위해 아무나 불러오게 하십니다. 새로운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누구나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빈부귀천, 민족, 직업, 남녀 등 어떤 차이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람들을 부르셨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누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들도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나님 나라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그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역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혈루증 여인도, 수로보니게 여인도, 문둥이와 거지들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문은 활짝 열렸고, 잔칫상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오기만 하면 누구나 편히 쉬고, 배부르게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혼인잔치에 오라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확장되는 원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입장권입니다.

아직 혼인잔치의 막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아무나 오라고 하십니다. 아무나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지금도 그렇게 만들어지고, 자라고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역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대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속사관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구속사관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를 분석하시며 미래를 예측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출현과 생애를 구속사의 대전환점으로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이 역사의 분기점이십니다.

예복

그런데 이 비유에서 꼭 집고 넘어야 할 것이 바로 예복입니다. 비유에는 예복에 관한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인잔치에서 쫓겨났다는 것만 말씀하셨습니다. 초대에 응한 것, 즉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해야 할 텐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납니다. 이미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을 임금은 예복을 가지고 재차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의 결론으로 제시된 "청함을 받은 이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에게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초대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들어가 아무렇게나 판을 벌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혼인잔치를 마련하시고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혼인잔치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임금이 지정한 절차와 의식을 따라 그가 제공하는 것을 먹고 마시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에 앉아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순간, 우리의 생애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생각하며 느끼며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예복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삶에 대한 비유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마땅히 그분에게 합당한 대우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과 긍정적인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요구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 한 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들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서시)

우리 모두 이 시처럼 치열한 삶을 살 수 있을 때, 예복을 입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고 앉을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을 낮추어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주님의 말씀에 담긴 그분의 사랑과 고민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예비해 두신 예복을 입고 하나님 나라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그분이 준비하신 좋은 것들을 마음껏 즐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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