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62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함께 묵상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 20:4). 우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이 성화나 조각품을 반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남의 사찰에 몰래 들어가서 불상의 목을 자르고, 단군신상이나 장승을 넘어뜨리는 경직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계명에 담긴 깊은 의미를 붙잡으려고 하지 않고,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깊이 묵상하면, 눈에 보이는 우상을 거부하는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우상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우리

두 번째 계명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상을 만든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광대하고 무한한 하나님을 이 세상의 어떤 형상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한 하나님을 우리가 만들어낸 형상에 가두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언제나 넘어서는 신비한 하나님을 나의 작은 이해 속에서 통제하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의 우화가 하나 있습니다. 코끼리가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생쥐가 찾아와서 코끼리에게 연못에서 나와보라고 합니다. 귀찮은 코끼리가 왜 그러냐고 묻지만, 생쥐는 "할 말이 있으니 나와 보라"는 말만 계속합니다. 결국 코끼리가 연못가에 가까이 다가가자 생쥐가 코끼리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 혹시 내 수영복 입고 있지 않니?”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생쥐는 혹시 코끼리가 잃어버린 자기 수영복을 입고 있지 않은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을 만드는 것이 꼭 이와 같습니다. 광대한 하나님을 작은 어떤 것으로 표현하고서는, 생쥐가 자신의 수영복을 코끼리가 입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파악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왜곡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을 우리의 좁은 소견 속에 가두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의 고집과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하는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넓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시내산으로 솟아올라야

둘째, 우리가 우상을 만들어내는 이유를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이 등장하는 출애굽기에 의미심장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입니다. 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를 출애굽기 32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에도 “우리를 위하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40일을 머무르는 동안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라진 것 같은 불안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자 이들은 아론에게 하나님을 대신할 금송아지를 만들라고 이야기합니다. 안정감을 주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 감정적인 뜨거운 체험을 찾아다닐 때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체험만을 쫓아다니다보면 좀 더 깊은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때로 하나님이 내 삶에서 사라진 것 같은 순간에도 침묵 가운데서 내 삶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만을 따라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침묵 속에서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실 때 금송아지를 만들어냅니다. 나를 뜨겁게 하는 것들만 찾아다니다가는 신앙을 현혹하는 것들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나를 위해서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하나님만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복을 주시는 하나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만을 원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내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당신 뜻대로 살아가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위로와 사랑을 느낄 정도로만 하나님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시내산 밑에서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시내산 위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솟아오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시내산 밑의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나를 위한 우상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그러나 삶에 새로운 길이 펼쳐지는 순간은 나를 위해 만들어낸 우상을 버리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순간입니다.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은 시내산에 계신 하나님을 산 밑에서 내가 만들어낸 우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내산 위의 하나님께로 솟아오를 때입니다.

사랑으로 살리려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십계명의 제2계명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5에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질투하는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드는 자에게 벌을 내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처럼 질투를 하시나? 하나님도 질투할 정도로 유치한 분인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깁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의 중심에 있는 것은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질투는 원래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없으면 질투도 생기지 않고, 관심도 생기지 않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를 안타깝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우상에게 달려갈 때 우리는 인생의 무의미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 곧 돈이라는 우상, 명예라는 우상, 심지어 믿음이라는 우상(내가 통제하려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매여 있을 때, 우리가 삶의 낭패감을 맛보게 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만든 모든 우상을 넘어서 광대하신 하나님을 붙잡을 때 경험하는 삶의 의미와 행복을 발견하기를 애타게 원하십니다. 그래서 “질투하는 하나님”을 다른 말로 바꾸면 “사랑으로 살리려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에 응답하면서 모든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경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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