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열전(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이 하늘의 뭇별들처럼 많아지리라는 약속을 재확인하셨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언약을 맺어 주셨다(창 15장).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날 자손이 반드시 약속의 후사가 될 것이다(15:4). 이렇듯 창세기 15장에서 후사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해 주셨지만, 창세기 16장을 펼치는 순간 정반대되는 현실을 만난다. 본문은 이 모순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1절과 2절에서 사라의 불임을 반복해 기술한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후손을 낳을 것은 분명하지만, 누가 그 후손의 어머니가 될 것인가? 사라는 불임이 아닌가! 과연 불임인 사라가 어머니가 되는 것이 가능한가? 꼭 사라가 그 후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나? 이제 아브라함에게 남은 현실적인 선택은 그리 많지 않다. 창 16:1은 “사라”라는 단어로 시작해 “하갈”이란 단어로 끝난다. 사라가 아닌 하갈이라는 대안을 찾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갈을 소개할 때, 이름을 먼저 말하지 않고, “여종”과“애굽 사람”이라는 말을 더 강조한다(실제 하갈이라는 이름도 경멸스런 의도로 지어진 히브리식 이름이다). 사랑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아브라함의 아내가 됨을 알려 주는 대목이다. 아마 그녀는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선물로 받아 가나안 땅으로 함께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창 12장).

많은 사람들이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위를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비난한다. 첫째는 첩을 들인 것에 대한 도덕적 관점에서의 비난이다. 현대에는 아이를 낳게 할 목적으로 남편에게 자신의 종을 들이는 것이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지만, 고대 근동 문화에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주인이 불임의 대안으로 첩을 들이는 것은 권리 중의 하나였다. 첩으로 들인 종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면 여주인은 자신의 품에서 아이를 키우며 후사를 잇도록 했다. 따라서 본문을 읽으며 도덕적 관점에서 비난하는 것은 최소한 이 문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둘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분의 행하심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불신앙의 결과로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첩에게서 자손을 생산하려 했던 노력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으로 치부하기보다, 15장 4절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비록 오해에서 기인했지만 약속에 대한 불신이 아닌, 15장에서 받았던 약속의 성취를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독자들은 사라가 약속의 후사를 낳을 존재임을 알고 있지만, 그 당시의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실임을 잊어선 안 된다(17:15-19).

우리는 아브라함의 선택이 처음부터 잘못되었음을 본문 전체의 흐름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먼저, 2절에서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듣고 따르는 모습은 에덴동산 이후 처음으로 여자의 말을 듣고 순종한 경우이다(창 3:17). 3절에서 사라는 하갈을 취하여 남편에게 주었고, 남편은 그 여종에게 들어갔다. 이것은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취해 아담에게 주었고, 아담이 먹은 것과 동일한 내용의 흐름이다. 이런 유사한 흐름은 16장의 사건을 부정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문학적 장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둘째, 창세기 16장과 12장의 흐름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16장에서 중심 인물이 아브라함에서 사라로, 바로 왕이 사라를 취한 것에서 아브라함이 이집트 여인 하갈을 취한 것으로 바뀌었을 뿐, 이야기의 흐름은 12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런 연결점들은 약속과 성취의 관점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선택이 옳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재확인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 알지 못했고, 그 결과 조급하게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애굽에서 아내를 빼앗겼던 아브라함은 이제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는다. 하갈은 본문에서 존중받는 여성이 아니라 전통적 의미의 대리모 역할만 한다. 그녀는 여종과 애굽 여인으로 소개되고, 학대받아 도망칠 때까지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으며, 철저하게 관계적 용어로만 등장한다 (내 여종, 그 여종, 첩, 당신의 여종 등).  그러나 하갈이 아이를 임신한 순간 가정내 역학 구도는 완전히 뒤바뀐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하갈은 약속의 씨를 잉태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갈은 더 이상 아이를 낳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집안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되었다. 과연 하갈이 잉태한 아이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후손인가? 그 아이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이기에 현재까지는 그 약속에 가장 근접해 있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하갈이 사라를 경멸한 데서 갈등이 생긴다. 한 집안에서 후손을 잉태해야 하는 여성들의 긴장관계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하는 것은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었다(창 12:2-3). 하갈은 대리모였고, 임신한 이후에도 하갈의 정체성은 지속적으로 “여종”이었기 때문이다(6, 8절). 이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문제가 생겼고,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하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사라는 보란 듯이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이 단어만으로는 사라가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단어는 폭력으로 번역되는 아주 심한 표현이다.

견디다 못한 하갈은 술 광야로 도망쳤다. 시내 반도를 지나 이집트로 가는 길목까지 내려간 것으로 보아 그녀의 목적지는 이집트였을 것이다. 하갈이 샘곁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녀를 불렀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그녀를 이름으로 불러준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특별하게 갑자기 임했다. 무려 세 번에 걸쳐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씀하셨는데, 주인에게 돌아가서 복종하라고 명했을 뿐만 아니라, 태어날 아이 역시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가질 것임을 약속했다. 하갈에게는 비록 고통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의 출생과 그의 미래에 대해 축복하신 것으로 인해 하갈은 주인에게 돌아가 복종하며 고통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하갈은 그곳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 부르며, 그곳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명명한다. 하나님은 하갈을 만나 주시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신다. 이스마엘이라 이름 지었을 때 그 이름은 하나님을 향해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와 같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가장 중심에 있는 사건이 바로 16장으로서,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장면이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전체 관심이 “누가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인가?”라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나는 본문의 이야기는 약속의 후손에 대한 질문에 심각한 긴장 관계를 만들어 낸다. 과연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후손인가? 아니면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 것인가? 전체 아브라함 이야기의 구조는, 16장을 한가운데 두고 대칭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16장을 한가운데 두고, 17장부터는 아브라함 이야기에 있어서 중요한 역전이 일어난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과연 그 어머니는 누가 될 것인가? 과연 이스마엘은 약속의 후손일까? 창세기 17장이 이에 대해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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