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16-21).

폭력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힘의 포기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 기사를 통해서 가장 먼저 강조된 사항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힘과 영향력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힘과 영향력이 있으면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더 많이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가 오래도록 기독교를 지배하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힘과 폭력을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체포되시던 마지막 순간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검을 뽑아든 베드로에게 검을 도로 집어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요 18:36).

예수님께서 '내 나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분명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참 하나님 백성들은 폭력을 수단으로 권리를 쟁취해서는 안 됩니다. 폭력으로 권리를 관철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감수합니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단벌의 속옷만이 아니라 겉옷마저 내주어야 합니다. 뺨을 맞을지라도 되받아쳐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폭력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폭력 평화의 나라입니다. 폭력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일은 오직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은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달라는 여인의 요구에 갑자기 그녀의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16) 대화의 주제가 갑자기 생수에서 남편으로 바뀝니다. 왜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생수라는 주제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지만 여인이 알아듣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여인의 믿음을 고취시키려 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여인을 회심시키기 위해 사생활을 건드리신 것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갑자기 도덕적 삶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고 무질서한 사생활을 비판하시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인은 사는 데 너무 지쳐 있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무조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따스함과 인내로 대하시며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시도록 초대하고(7) 그릇된 이해를 인내와 친절로 바로잡아 주시고(21) 마침내 믿음으로 이끌어 주십니다(24,26).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 그녀는 솔직하게 지금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겠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녀의 방어벽은 허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는 말씀을 어떤 어조로 하셨을까요?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그 여인의 어두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그녀의 과거를 언급하신 것은 단순히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보이기 위함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장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녀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상처의 아픔을 어루만져 줌으로써 그보다 더 깊은 영적 목마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신학자 린 앤더슨은 이렇게 풀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이해한단다. 너는 가슴 아픈 경험을 무려 다섯 번이나 했구나. 얼마나 네 마음이 뭉그러져 있는지 나는 이해한다. 지금의 관계도 언제 깨질지 모르기에 네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나는 알고 있단다. 아 불쌍한 딸아. 너는 사랑도 기쁨도 기댈 수 있는 가정도 없구나."( 『예수님께 배우는 인간관계』 중에서)

앤더슨은 여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라고 한 말도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보여 주신 연민과 위로의 연장선상에서 알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와서 보세요. 내 모든 꿈과 눈물을 아시는 분을 우물가에서 만났어요. 그분은 내 첫 번째 결혼식, 흰 예복을 입고 수줍음에 얼굴 붉히던 내 모습을 알고 계셨어요. 그분은 귀여운 아기를 키우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제 소박한 꿈도 알고 계셨어요. 그리고 제가 첫 남편에게 이유도 없이 이혼 당했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잘 알고 계셨어요. 그분은 제가 이혼 당하고 나서 숱한 밤을 눈물로 지샌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분은 또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남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음을 아셨어요. 매번 새로운 남편에게 버림받으면서 네가 얼마나 깊이 절망하여 죽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 그분은 알고 계셨어요. 이제 제 마음은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분이 그동안 제가 그렇게도 갈망하며 찾아왔던 생명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거든요. 그러니 여러분도 어서 우물가로 달려가 그분을 만나보세요."

여인의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서둘러 우물가로 달려갔습니다. 그들 모두 상처와 목마름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순수혈통을 잃고 무시당한 상처를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정서적 목마름을 채워주시고,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신 분이라면, 그녀의 말대로 그리스도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 달려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 주시지 않았지만, 그녀 스스로 그분이 선지자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마음 깊이 깨달아 확신에 찬 태도로 다른 이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스스로 열 때까지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19-20). 이 구절은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여인이 화제를 돌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에 놀라면서,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분이라면 '선지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동시에 정서적 목마름을 채워주신 그분께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는 구원의 두려움, 곧 영적 목마름을 드러내며 적극적으로 예수님과의 대화에 뛰어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만 바르게 예배드릴 수 있고 구원을 얻게 되리라 믿고 있었는데 사마리아인들은 거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나름의 성전과 예배가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라는 말에는 이런 속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제 삶은 너무나 공허하고 불안합니다. 저에겐 구원해 주시는 생명의 하나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유대인들처럼 정통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 제발 가르쳐 주세요." (린 앤더슨, 같은 책)

헬라어 성경을 보면 구원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잘 드러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에서 '예배하였는데'는 과거 시제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동사를 쓴 것은 그리심 산에 세운 성전을 기원전 128년에 유대인들이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은 희생제사를 봉헌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리심 산으로 순례만 갈 수 있었습니다.

또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한 말에서도 사마리아인들의 영적 불안감을 볼 수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여인의 말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미인 동사 '데이'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직역하면 "당신들의 말은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더이다."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의 합법성과 유일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깊은 아픔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선지자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실 사마리아인들에게 선지자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의 선지자입니다. 그녀가 말한 선지자는 당시 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다윗 가문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성경으로 인정하는 사마리아 모세 오경에는 다윗 가문의 메시아에 대한 예고가 없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이 죽은 후 다윗 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나머지 열 지파로 이루어진 북이스라엘의 후손들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에게 유다 지파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말한 선지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신명기 18장 15-18절에 근거하여, 마지막 시대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오리라 믿고 있었고, 그 선지자를 '타헤브'라고 불렀습니다. 타헤브란 '돌아올 자', 또는 '회복시키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타헤브가 오면 하나님의 진리를 충만하게 계시해 주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마리아 여인이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5)라고 한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기다리던 타헤브, 곧 진리의 계시자를 가리킵니다.

어찌 되었건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던 대화의 본론에 다다르게 하셨습니다.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고 그녀 스스로 문제의식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떠오른 것은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아씨시의 성자라 불리던 프란체스코 수사가 지은 평화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입니다. 상처가 있는 곳에는 '치유'와 '위로'가 있어야 할 터인데, 프란체스코는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간구야말로 다른 어느 대목보다도 더 깊은 평화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상처를 입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존심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손상을 입으면 우리의 영혼은 피를 흘립니다.

그런데 상처 입은 자리에서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자기에게 상처를 입게 만들었던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존심을 내려놓는 바로 그 순간 실체를 드러냅니다.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자존심을 내려놓은 이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으셨으며 또한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자존심을 내려놓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또한 그녀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 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그녀를 따라가 주면서 그녀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줄곧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가 변합니다. 주님을 부르는 호칭이 '당신'에서 '주님'으로 변합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은 그녀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로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자신이 만난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린 그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그녀는 어떻게 스스로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가 그녀의 정체성을 바꾸었습니다. 자존심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방어기재라면, 인격적 정체성은 내면에 깊이 뿌리 박힌 신념입니다. 인격의 정체성이 확고하다면, 세상의 온갖 파도와 풍랑 앞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에 대한 신뢰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신뢰가 없기에 우리는 조그만 상처에도 금방 토라지고 발끈해서 턱없이 혈기를 부립니다. 자존심은 천박하리만큼 강한데, 믿음과 인격의 정체성은 터무니없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열등감이나 문화적, 지적 콤플렉스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이웃의 올곧은 성품 앞에서 윤리적 열등감을 자극받고, 다른 사람의 올바른 말에 지적 콤플렉스를 추스르지 못하여 자존심에 스스로 깊은 상처를 새깁니다. 바른 말을 들을수록 더 아니꼽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만 보면 '자기 의에 사로잡힌 교만한 자'라는 비난을 퍼붓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쉽게 상처받는 우리의 옹졸한 자존심과 그 누추한 열등감의 뿌리를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우리의 자존심은 우리를 늘 넘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에 대한 신뢰에 뿌리를 내린 우리의 정체성으로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부족을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섬세하게 섬겨 그들 역시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제대로 만난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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