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참된 예배

1)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내 말을 들어라."라는 간곡한 어조로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이 말 속에는 참된 예배에 대한 가르침을 마음을 다해 들어야 한다는 것과 사마리아인을 위한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먼저 참된 예배는 지리적 장소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심코 아버지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를 지나치지만, 그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가장 분명하게 다른 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언제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 없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 여인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녀가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딸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멀리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예배를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와 자식 간이라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아버지로서 인간의 예배를 받는 분이십니다. '과연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 질문이야말로 참된 예배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입니다.

2) 전체적 가르침에 기초한 예배
참된 예배는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에 기초한 예배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원문으로 보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예배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의 일부분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다른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토라와 비슷한 것으로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성경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언서와 역사서 그리고 지혜서가 빠져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부분적으로 알았기에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 없는 구시대의 성경이라면서 신약성경만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은 구약에서 약속된 구원이 성취된 시대이고 은혜의 시기이기 때문에 약속을 제시할 뿐이었던 구약성경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성경은 신약성경 안에서 드러난다."

유대 전통에는 아침 기도에서 반드시 암송해야 하는 탈무드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고,
친절한 행동을 실천하며,
아침저녁으로 랍비 연수원에 일찍 나가고,
손님을 환대하며,
아픈 사람에게 문병 가고,
결혼하는 걸 도와주며,
망자와 무덤까지 동행하고,
기도의 의미에 집중하며,
동료들을 화해시킨다.
그리고 토라 공부는 이 모든 것을 합한 것과 같다."

열 가지 모두 중요한 내용이지만, 우리는 마지막 기도에 주목해야 합니다. 토라 공부의 중요성이 다른 모든 계율의 중요성을 합한 것과 같다는 걸 상기시켜 줍니다.

"랍비 타르폰과 다른 랍비들이 리다에 머물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 '공부가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실행이 더 중요합니까?' 랍비 타르폰이 말했다. '실행이 더 중요합니다.' 랍비 아키바가 말했다. '공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자 다른 랍비들 모두가 말했다. '공부가 실행으로 이어지기에 공부가 더 중요합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키두쉰 40b)

그래서 유대인들은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들의 중세 속담에는 "기도를 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지만, 공부를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말도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유대 전통을 이어받아 날마다 성경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날마다 성전에 모였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전심을 기울였습니다.(사도행전 2장 참조)

참된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참된 예배란 배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는 24절 말씀에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미의 동사 '데이'가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성령이 이끄시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분의 양자가 된 자녀들이 드리는 예배는 당연히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여야 합니다. 성령의 활동 없이는 참된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 우리는 늘 고민을 해야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그분께 집중하고 그분께 듣고자 하는 열망을 가질 때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로마서 8장 26절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기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영과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 나를 위해, 나와 함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인식하고 대화하면서 그분의 뜻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성령과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흐트러진 삶을 조율하고 새로운 힘과 지혜를 얻어 삶 속으로 다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은 성령과 진리가 하나이기에 성령과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성령, 곧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과 엄숙하고 의식적인 제의에 의존하는 예배가 아니라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성령, 곧 진리 안에서 당신을 예배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기서 '찾고 있다'라는 헬라어 동사 '제테오'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동사는 간절히 원해서 열심히 찾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search', 혹은 'strive for'로 번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바르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곧 진리의 성령 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의 성령 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예배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프로스퀴네오'는 '누구에게'라는 뜻인 전치사 '프로스'와 '입 맞추다'라는 의미의 '퀴네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참된 예배란 하나님과 입을 맞추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배하다'라는 종교적인 용어가 '입 맞추다'라는 육적이고 세속적인 용어와 연결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입을 맞춘다는 것은 육체와 육체가 접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면 입을 맞출 수 없습니다. 입을 맞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친밀하다는 뜻입니다. 또 상하 주종 관계에서는 손등에 입을 맞춥니다.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상하 주종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밀한 애정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배란 하나님과 입을 맞추면서 친밀한 애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입맞춤은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애정과 기쁨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애정 어린 입맞춤은 오직 상대방만을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입을 맞추면서 다른 곳을 보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입을 맞추는 예배는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그분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원하시고 그런 마음으로 당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기다리시지 않고 찾아 나서기까지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려면 우리는 마음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연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가 되고, 작은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전심으로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마음이 나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돈은 가장 확실하게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는 우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과 세상에서의 성공은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교만하게 만들어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의지하지 않도록 만드는 암적인 고질병입니다. 나눠진 마음으로는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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