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와의 결별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영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고, 영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는 분별하지 말라는 게 성인들의 지혜이다. 영적인 자유함이란 ‘우리 자신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인 데 반해, 완벽주의란 ‘우리 자신을 우리의 자아로 채우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두 성향은 결코 화해하기가 쉽지 않다.

고로 내가 주인이 되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 안에 갇히고 마는 완벽주의를 추구할 건지 아니면 하루빨리 완벽주의적인 성향마저 내려놓고, 하나님에 뜻에 따라 분별할 건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주님을 우리의 의지로 ‘마음의 문을 열어’ 구주로 영접했듯이, 그리고 우리의 의지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넓은 길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가는 좁은 길을 택했듯이, 완벽주의를 포기할 건지 안할 건지도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각오에 달려 있다. 아니면 우리를 부서질 대로 부서지고 낮아질 대로 낮아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통해 삶의 총체적인 바닥을 찍고 완벽주의의 덫에서 해방되는 극단적인 처방도 있다.

자, 결정하라! 지금 이 상태에서 자신의 각오로 완벽주의와 이별하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잃고 나서, 독일 베네딕트 수도사이자 수도원 영성의 거장인 안셀름 그륀의 말대로, 머리를 벽에 들이박아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난 뒤 마지못해 완벽주의에서 벗어나게 되도록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든지!

완벽주의의 심리학적 정의는, ‘스스로 비현실적인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행동이나 믿음’이다. 일종의 강박이며 정신적 장애로 취급될 수 있는 이런 완벽주의 성향은, 우선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웠다’는 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그 문제는 남이 아닌 본인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즉 본인이 철창을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과 같다. 철창의 문도 안에서 잠가 버렸으니 외부에서는 들어갈 수 없는 출구 없는 철창이다. 즉 완벽주의자는 스스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말한, 성과사회의 특징인 ‘자아착취’와 다르지 않다. 자아착취란,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켜 버리는 행위를 말한다.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하려고 한 것에 대해 후회했고 말년에 우울증까지 걸렸다. 남들의 찬사와는 달리 그는 자신에게 불행한 사람이라는 라벨을 붙였고, 노후는 쓸쓸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명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 그레이도 비현실적인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과 쾌락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 역시 늙어감과 추해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친구 화가가 그려준 늙어가는 초상화 덕분에 찬란한 청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도리안의 내면은 병들어 가고 지독한 악취를 풍기게 된다. 타인의 감정에는 무관심한 그는 첫사랑의 여인을 자살로 몰고 가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준 화가를 살해한다. 마침내 38세의 어느 날 밤, 청춘을 유지시켜 준 초상화를 칼로 찢고, 쭈글쭈글한 주름투성이의 추한 얼굴이 되어 바닥에 쓰러져 죽고 만다.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완벽주의는 실패로 끝난다.

하버드 대학생들에게 최고의 행복을 선사했다는 『완벽의 추구』의 저자이자 ‘긍정심리학’ 교수인 탈 벤 샤하르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완벽의 추구’에 있으며, 그런 증상의 원인으로 세 가지 거부 심리를 말한다. 첫째는 실패에 대한 거부이고, 둘째는 고통스러운 감정에 대한 거부이며, 세 번째는 성공에 대한 거부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거부심리는 완벽주의의 일반화된 폐해로 알려져 있지만, 세 번째로 완벽을 추구하는 자는 성공조차 즐길 수 없다는 것은 이 저자만의 새로운 성찰이다. 이런 강박의 근저에는 끊임없는 ‘자기 향샹’과 ‘자기 확인’의 심리적인 기제가 작용한다고 샤하르는 분석했다. 결국 완벽을 추구하는 자는 그 어떤 것도 만족하거나 즐길(감사할) 수 없는 인간,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는 인간, 다름 아닌 반은혜주의자로 전락하고 만다.

헨리 블랙커비도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영적 리더의 실패 원인으로 결과지향주의와 완벽주의를 지적했다. 이 둘은 결국 같은 이야기다. 그는 교회의 일이든 개인의 일이든 간에 ‘모든 일이 언제나 탁월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미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영적 리더십의 목표는 매사를 완벽하게 한다는 의미의 탁월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현재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데려가는 것이다”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현재 있는 자리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던 요르단 강가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죄가 차고 넘치는 곳이지 완벽한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역시 이런 ‘끔찍한’ 죄 가운데 있는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지 거룩하고 순결하고 완전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분별이라고 다르지 않다. 분별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자리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과정이지,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자리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만세를 부르면서 끝내는 어설픈 파티가 아니다.

엘리자베스 리버트가 그녀의 책 『영적 분별의 길』에서 말했듯이, 분별은 “우리가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더 잘 일치하는 것을 찾고 선택할 때마다,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옷을 입게 되는 과정(빌 2:5; 고전2:14)”인 것이다. 우리들의 분별의 목적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합일로 인도하는 완덕(完德)의 길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들이 지금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문제는 더욱 더 우리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다.

안셀름 그륀은 그의 책 『아래부터의 영성』에서, 마가복음 3:1-6에 나오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는 현재의 상태를 고수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과감히 새로운 일을 해나가지 못하는 사람을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같은 부류로 봤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자신의 손가락을 태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손을 오므려버렸다(이 사람의 과거다). 그래서 그의 손가락이 오그라들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선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고,  위험부담도 없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명령했다. “손을 펴시오!” 그러자 그의 손이 펴졌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손을 펴지 못하는 자와 다름없다. 손을 펴야 기적이 일어나는데, 손을 편 후의 결과가 두려워 손을 움켜쥐고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다.

분별을 한다면서 마냥 그 문제에 붙들려 있어도 안 된다.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도 정도껏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느 순간이 되면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벼랑 끝으로 오라’에서 보듯이, 등을 떠밀려 절벽에서 떨어지기보다 스스로 뛰어내리는 대범함이 필요하다. 마침내 ‘스스로 날게’ 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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