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열전(7)

무려 13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16장의 마지막 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86세였고, 바로 다음의 17장 1절에서 그의 나이가 99세라 하니, 창세기의 저자에게 아브라함의 13년은 그다지 기록하고 싶지 않은 역사인 셈이다.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을 단 한 절로 요약한 저자는, 그 이후 약 1년이라는 시간을 묘사하기 위해 창세기 17-21장을 할애한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도우므로, 내러티브 시간과 실제 시간 사이의 간격을 주목해 읽는 것은 단락의 중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의미 없이 흘러간 듯 보이는 13년 동안 아브라함은 어떻게 지냈을까? 17장 이야기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여전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후사를 소망하며 살았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17장은 아브라함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보인다. 사라는 여전히 불임이었으나 아브라함에게는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다. 노년에 얻은 아들의 재롱을 보고 성장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다. 99세때 자신의 생식 능력이 더 이상 없음을 인지했다고 전제한다면, 창세기 25장에서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를 취해 여섯 아들들을 낳은 이야기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25장의 사건을 사라의 죽음과 이삭의 결혼 이후라고 가정하기에는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140세부터 여섯 아들들을 차례로 낳는다는 것은 17장의 문맥에서 볼 때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이스마엘의 출생 이후 13년 동안 아브라함은 다른 아들들도 낳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성경이 그것을 시간적 순서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출생이 현재 집중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야기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 그 시간 동안,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가 출생했다고 믿고, 다른 자녀들을 낳으며 세상적으로 만족하고 형통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99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후손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실 때 아브라함의 반응이 이해될 법도 하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를 주시겠노라 말씀하실 때도, 사라의 몸에서 자녀를 주실 것이라 약속하실 때도 그저 웃으며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며, 이스마엘만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18절).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17장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가려져 있고 훼손되어 있다. 더욱이 약속의 대상자인 아브라함에게서는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 지켜진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장 먼저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라는 이름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출산 가능성이 사라진 이 시점에 강력한 울림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심으로써, 이스마엘을 낳고 살아가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신 것이다. 특별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하심으로, 지난 13년간 아브라함의 삶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이미 맺어진 그 언약을 새롭게 회복시키사, 99세가 된 아브라함의 죽은 몸을 통해 당신께서 약속하신 자녀를 주실 것을 확인시키신다. 하나님의 준엄한 목소리를 들은 아브라함은 머리를 땅에 대며 엎드리고 말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아브라함을 다시 불러 세우셨고, 폐기처분되었던 그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창 15:18에 ‘언약을 세운다’는 표현이 있는데, 본문은 좀 더 다른 표현을 써서 이미 있는 표현을 다시 새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특별히 본문에서 아브라함, 사라, 이스마엘 세 사람을 향한 약속의 말씀이 새롭게 된다. 먼저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셔서 그가 열방의 아버지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고,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이어질 “영원한 언약”이 될 뿐만 아니라 약속으로 주시는 그 땅은 “영원한 기업”이 되도록 하실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영원한 언약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동참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뿐 아니라 사라의 이름도 주시며 그녀를 통해 여러 민족과 왕들이 나오게 될 것임을 확증하신다(16절). 지난 수십 년 동안 사라는 불임이었다.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종종 재확인됐지만, 사라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일정 부분 가려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이 완전히 쇠하여 출산의 가능성이 사라진 시점에, 하나님께서 사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 주신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실 것을 기대하고 만족하며 살았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기대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당신의 약속을 확인시키시며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 지어 주신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영원한 언약”을 이삭과도 맺으실 것이라 말씀하신다(19절). 생리가 끊어지고 나이가 많은 그녀가 이제 열방의 어머니가 될 것이요, 수많은 왕들이 그녀에게서 나오게 될 것이다.

이스마엘에 대한 말씀은, 그가 비록 영원한 언약을 맺은 약속의 자녀는 아닐지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그 또한 큰 민족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적 관심은 일 년 후 태어날 아들 이삭에게 온전히 집중되어 있다(21절).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으신 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으로,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불신앙적 웃음을 지었던 것을 상기시키고, 또 하나는 육신적으로 출산이 불가한 노년의 부부가 아들을 낳음으로 인해 그들과 주변 사람들이 웃으며 즐거워할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17장에서 아브라함의 웃음은 기쁨이 아니라 불신앙이다. 18장에선 아내 사라까지 불신앙적 웃음에 동참할 것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1년 안에 그 불신앙적 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새롭게 하신 이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모든 집안 사람들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다. 할례를 행한다는 말의 히브리어적 의미는 “언약을 자른다”는 뜻이다. 몸의 일부를 잘라내고 피를 흘림으로써 언약 백성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행위다. 이는 이중적인 성격이 있는데, 남성 생식기의 포피를 자르는 것은 언약에 충실하지 않을 경우 공동체에서 잘려 나갈 수 있다는 경고를 포함한다. 하나님과 백성 간의 언약 관계가 새로운 각도에서 정립된다.

할례가 지향하는 바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이미 할례를 단순한 육신적 할례가 아닌 다른 할례, 즉 마음의 할례를 언급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레 26:41; 신 10:16).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것은 목을 곧게 하지 않는 것이며,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할례는 새 언약의 상징인 세례로 대체되었다(골 2:11-13; 롬 4:11; 갈 3:27-29).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의 고백이요, 그리스도의 소유됨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약 공동체로서 교회는 세례 공동체이며,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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