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한복음 4:15-18).

사마리아 여인

여인이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라고 한 말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4)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한 것일까요?

수도 시설이 없던 당시의 여인들은 물 긷는 일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여인들이 해야 하는, 가장 큰 일이 바로 날마다 물 긷는 일이었습니다.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날마다 산 위에 있는 집에서 산 아래 있는 야곱의 우물 사이를 오가야 했습니다.

고대 마을들은 대부분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마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을은 언덕 위에 있었고, 야곱의 우물은 마을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평지에 있었습니다. 무거운 물동이를 들고 날마다 왕복 4킬로미터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은 얼마나 고된 일이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의 목마름 때문에 예수님께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청했지만, 계속되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면 그녀에게 육신의 목마름보다 더 근본적인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정서적인 목마름과 영적인 목마름이었습니다.

정서적 목마름은 그녀의 불안정한 생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 문화에서 여자는 두 차례 결혼할 수 있었고, 최대 세 차례까지 가능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인 면에서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했으므로 사마리아 여인들의 결혼 횟수 또한 유대인들과 같았거나 더 적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이 다섯 번이나 결혼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대단한 스캔들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경멸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고로는 사마리아 여인을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의 결혼 관습에서 여자들은 남편에게 이혼을 청구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남자들은 아주 간단하게 아내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든 만들어 이혼장만 써주면 언제든지 아내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음식을 태워도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남편이 밭에 나갔다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도 충분한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아내를 데리고 살면서 미워하기보다는 이혼해서 보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게 이혼 사유였습니다.

당시에는 남자이기만 하면 맘대로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가족법은 철저히 남성 본위였습니다. 미쉬나에는 양심에 걸리거나 마음이 약해서 차마 이혼 얘기를 못 꺼내는 남자를 위한 특별규정까지 있었습니다. 부인이 잠을 자는 동안 남편이 부인의 손에 이혼장을 쥐어 주는 것입니다. 만일 부인이 잠에서 깨어나 먼저 이혼장을 보면 이혼이 성립되지 않지만, 부인이 잠에서 깨자마자 남편이 곧바로 '그거 이혼장이야.' 하면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또 부인이 옥상에 올라가 일할 때 이혼장을 옥상 위로 던지며 부인에게 '그거 이혼장이야.'하면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에게 다섯 번이나 버림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남자를 찾아야 했던 이유는 생계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남편 없이 산다는 것은 보호자의 돌봄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자는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고, 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이혼을 당하면 여자는 다른 남자의 후처로 들어가거나 몸을 팔거나, 길거리에서 동냥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남편이 죽어 홀로 된 여인은 흰색 옷밖에 입을 수 없습니다. 흰 색 옷을 입은 여인은 아침 일찍 거리에 나갈 수도 없습니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고 폭행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불합리한 폭행을 당해도 고발할 권리 자체가 없습니다. 심지어 홀로 된 여인은 고기조차 먹을 수 없습니다. 남편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사마리아 여인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지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삶은 남편들에게 버림받으면서 점점 더 황폐해졌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한낮에 물 긷는 여인

당시 여인들은 더위를 피해 주로 아침이나 저녁에 물을 길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햇볕이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학자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한편 사마리아 여인의 말 속에는 무력감과 자포자기의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이처럼 타오르는 목마름을 안고 살아가던 여인 앞에 생명의 주님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녀의 타는 목마름을 깊이 느끼신 예수님께서 새벽부터 서둘러 유대 땅에서 야곱의 우물까지 땡볕 속을 걸어오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말라하는 여인과 가장 오래 대화를 나누시며 희망과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가난하고 불쌍하며, 죄 많은 인간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육신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 모두를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의 목마름, 인간관계의 목마름,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모든 인간들은 육체적으로 목이 마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겉으로는 만족스럽게 보여도 속에는 육신적인 목마름이 숨어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도 목이 마릅니다. 조각난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단어가 바로 '힐링'입니다. 위로와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으면, 욕구불만과 정서불안에 시달리게 되며, 자기부정으로 이어져 우울해집니다.

세계보건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 세상에 가장 만연한 질병이 우울증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약을 먹는지 강물에서 에펙서-XR이나 프로작과 같은 우울증 약의 성분이 허용치 이상으로 검출되고 있다고 합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는 사마리아 여인의 말은 바로 우리들의 절망적인 외침이요 간절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만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의 나머지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그녀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물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의 삶은 여전히 비참했을 것입니다. 속절없이 세월은 흘러갔을 것이고 그녀의 육체는 시들어버렸을 것이고 그녀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며, 희망이란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대로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십니다. 그분만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기에 그 물을 마실 때에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날마다 예수님 안에서 생명과 삶의 의미를 찾는, 그래서 목표와 방향을 잃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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