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한복음 4:35-42).

“믿게 하려면 먼저 무릎을 꿇게 하라”

그동안 사마리아 여인의 기사를 여러 번 묵상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마리아 여인 기사에 담겨 있는 충격적인 의미들을 제대로 끄집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기사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얼마나 충격적이고 획기적인 일이었는가를 유대인이 아닌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 기사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급진성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문화와 통념을 뒤집고 새로운 신념 체계를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바꾸신 예수님의 놀라운 인내와 통찰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인들과 제자들의 신념 체계를 모두 변화시키셨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위대한 성취인가를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기사를 읽으면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이미 확고하게 새겨져 있는, "믿게 하려면 먼저 무릎을 꿇게 하라."는 신념이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념의 체계를 유지하는 데 종속관계 만큼 효과적인 방책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람들을 먼저 무릎 꿇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이 기적적인 은사를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 다음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일단 사람들이 무릎을 꿇으면 그런 사람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이끌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 사람들을 이용해 큰 건물이라도 지어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굴러가게 됩니다.

인간이란 자기 생각에 강하게 집착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생각을 동일시하면서, 생각을 바꾸면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이라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수해 온 확신이 무너지는 것에 엄청난 당혹감을 느낍니다. 그들이 직면하는 도전은 이 생각을 저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불확실로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재이기에 먼저 무릎을 꿇려 놓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자기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보다 더 신봉하는 것이 바로 "믿게 하려면 먼저 무릎을 꿇게 하라"가 되었습니다. 먼저 힘으로 굴복시키라는 것입니다. "믿게 하려면 먼저 무릎을 꿇게 하라."는 말은 레닌의 신조입니다. 그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그것이 광야의 예수님을 유혹하던 사단의 신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단의 유혹에서 비롯된 비종교인의 신조를 기독교 지도자들이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의 대리자라는 영적 권위로 신도들의 무릎을 꿇리고 그 영혼을 예속시키는 종교 권력이 똬리를 틀면 틀수록 신앙은 타락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기사는 힘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을 무릎 꿇리지 않고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확인시켜 주는 한 편의 복음 드라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어도, 설사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강제로 사람들을 무릎 꿇게 만드는 일로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사마리아 여인의 기사로부터 배우고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분쟁

예수님께서는 잠시 후면 사마리아 여인을 앞세우고 우물가로 몰려올 사마리아인들을 잘 맞이하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준비시키십니다. 제자들은 의심을 품고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사마리아인들을 형제와 자매로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이틀간 더 머무시면서 사마리아인들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기존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가르치시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잘 맞아들일 수 있도록 먼저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성경학자인 램지 미카엘에 따르면, 제자들은 세례를 주어 예수님의 일에 협조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에 머무는 이틀 동안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게 된 사마리아인들에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요단강에서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세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잘 알려진 유대 사회의 속담이었습니다. 이 말은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려면 일정 기간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리지만 넉 달이 지나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어들이듯 수고하는 때가 있으면 수확하는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건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속담을 말씀하신 이유는 당신에게는 이 속담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오심으로 더 이상 파종과 수확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씨앗을 뿌리자마자 여인은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뿌림과 동시에 수확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로 달려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같은 날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동네 사람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우카이', 즉 희어졌다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곡식이 희어졌다면 익은 것이 아니라 병들거나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하얀 옷을 입은 사마리아인들이 당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흰 옷을 입는 민족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공생애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짐과 동시에 수확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종말론은 현재적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종말론을 현재적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을 형제와 자매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황폐해지고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눅 11:17).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하시는데 제자들이 그것을 싫어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 되면 예수님도 어쩌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종파로, 교단으로, 개교회로 갈라져 도무지 한 예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애를 느끼는 경우도 보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이 된 것입니다. 그 일의 심각성을 사람들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구원만으로 끝나는 기독교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공동체를 이루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당신과 나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고 하였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주님이 계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면, 우리 사이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민족과 혈연과 갈등과 분쟁을 넘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어 그분의 몸을 이룬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길 바랍니다.

세상의 구주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많은 진리를 배우고 싶어 자기들의 마을에 유하시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을 받아들여 이틀 동안 그들과 함께 머무셨고 덕분에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믿음은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었기에 초보적 단계의 믿음 혹은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이틀을 함께 있으면서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이 점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고백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42). '세상의 구주'는 사마리아인들이나 유대인들을 넘어서서 온 세상 모든 민족을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기다려온 '타헤브'(돌아온 모세)로 고백하거나 또는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로 고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의 42절을 보면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우리가 친히'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직접 듣고 예수님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한 '세상의 구주'라는 말은 대단한 신앙고백입니다. 그 말은 로고스 찬가와 세례 요한의 증언, 요한복음 저자의 복음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선포된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인간을 비추는 빛이시요(1장 9절 로고스 찬가), 세상 모든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는 분이시요(1장 29절, 세례 요한의 증언), 또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3:17, 요한복음서 저자의 복음관)이라는 선포 내용을 다 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 곁에, 예수님 안에, 예수님 말씀 안에 그리고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교리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교리를 믿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들과 경험들이 쌓여야 합니다. 단지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만으로는 그분을 존재 차원에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분 안에 머무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예배에 참여하고, 개인적인 기도 시간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해 봄으로써,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로 알게 됩니다. 주님 안에 머물고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체험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어, 어떠한 세상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심을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 됨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42).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고백하는데 그 고백은 예수님께 직접 한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태여 이런 말을 여인에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과 같은 그런 태도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받기가 쉽습니다. 처음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게 되었지만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여인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 말을 알아듣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한 역할을 인정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에서 한 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징검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된 그들은 징검다리가 되어준 여인에게 에둘러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여인과 사마리아인들의 대화와 신앙 나눔은 여인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말입니다.

참 신앙은 반드시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참 신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순수하게 만들어 불신과 반목을 넘어서게 합니다. 참 신앙을 가지고 만나게 될 때 더 이상 갈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받아들인 곳에는 불신이나 대립이나 단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화해와 소통, 일치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왜 사마리아인들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을 준비시켰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세상은 반드시 사람들을 갈라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드시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 줍니다. 하나 됨이야말로 참된 복음의 증거이며 시금석임을 늘 기억하며 복음으로 하나 되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기사에 담겨 있는 급진성

사마리아 여인의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은 3장에 등장했던 니고데모와 대조적입니다. 유대인이며 바리새인이며 학식이 높았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구원 메시지 앞에서 회의적 물음만 던지다 소리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며, 사회적 윤리적으로 버림받았던 여인은 구원의 메시지 앞에서 적극적인 신앙의 응답을 보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사마리아 여인이 보이는 적극적 신앙의 응답을 여러 측면에서 소개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엉뚱한 반응을 보였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지자이심을 간파하고(4:19), 예수님께서 당신을 그리스도로 계시하자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25-29). 그녀는 진리를 간파할 수 있는 통찰력과 순전한 태도를 갖고 있었기에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여성들 가운데 가장 먼저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보여준 신앙의 적극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신앙을 담대하게 증언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녀가 동네 사람들에게 했던 복음 증언이 사도들의 복음 증언과 같은 차원임을 알려 줍니다. 먼저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와 보라"(29)고 증언합니다. "와 보라"라는 말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한 말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평행 문구를 통해 사마리아 여인의 복음 증언을 사도들의 증언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여인의 말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과 사도들의 말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을 나란히 두어, 사마리아 여인의 복음 증언이 사도들의 복음 증언과 같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말을 듣고 믿게 되었다.'를 가리키는 헬라어 문장은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고별사에서 열두 제자들의 말을 듣고 당신의 말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쓴 표현과 똑같습니다. 이러한 평행 요소는 사마리아 여인의 복음 증거 역할이 사도들의 역할에 못지 않음을 알려 줍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의 사명 수행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로써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인데, 사마리아 여인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성 차별이 심했던 당시에 사마리아 여인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소개한 요한복음 저자는 과연 누구였으며, 저자의 소개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을까요? 성경학자 에블린 스테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구성한 사람은 그가 누구든 여인을 '말씀의 봉사자로'로 나타내는 것을 주저하는 당대의 여성 차별 문화에서 해방된 사람일 것이다. 이 복음서를 산출하고 받아들인 공동체는 분명 그러한 여성 존중의 관점을 충분히 수용할 만한 공동체였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주목 받을 수 없는 가장 비천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여인의 위대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런 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큰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큰 자가 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지극히 작은 자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이 분명하다면 우리의 성취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증거로 공동체 내의 가난한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그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온전히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 일을 시작하는 순간, 새로운 나라가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의 샬롬은 우리 모두를 행복으로 이끌 것입니다. 복음의 복음 됨을 그곳에서 깨닫고 복음을 주신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함께 손을 잡고 그 나라 속에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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