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요한복음 4:43-45).

필요

"필요 앞에는 법도 없다." 영국 속담입니다. 사람들은 법을 무시하고라도 필요를 꼭 충족시키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필요하다면 악도 허용될 수 있다." 는 말도 있습니다. 필요악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서정시인 시모니데스는 "신도 필요와는 싸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결핍의 존재입니다. 결핍의 존재인 인간이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면, 신 역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필요라는 가장 위대한 신을 추출해낼 수 있습니다. 그 필요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과 필요의 절대성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갈림길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필요의 절대성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고 해서 필요가 사라지거나 충족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로 섬긴다는 것은 필요에 초연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바로 그것을 배우는 신앙의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어렵기 때문에 인간은 필요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필요 앞에 무릎 꿇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그렇게 왜곡된 하나님이 지배하는 종교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증거와 기적을 요구하고 확인하는 일로 드러납니다. 참된 신앙은 필요에서 해방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고, 그들이 가는 길은 고독합니다. 요한복음 4:43-45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반복되는 기적 신앙에 대한 경고

44절에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이 두 문장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성경 기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 즉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적에 근거한 믿음은 미성숙합니다. 기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기적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했기에 언제든지 돌아설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6장에는 그러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라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복음 기자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곧바로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에 열광하여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기사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 기자는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에서 곧장 왕의 신하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고 이런 내용들을 집어넣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유가 기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두기 위함입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왕의 신하는 기적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기적만 요구합니다. 상반된 두 태도를 명확하게 대비시키기 위해 이 구절들이 삽입되었습니다.

오늘도 반복되는 똑같은 문제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의 미래를 예견한 그의 책에서 오순절 계통의 개신교와 신비적 동방 교회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계통의 개신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과연 기독교가 살아남는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오순절 계통의 성령 운동은 세속적 성공주의와 결합한 성령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체험, 방언이나 치유의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은 개인의 내면적 평화와 계층 상승의 기대감을 하나로 묶어 이기적인 경제주의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잘 사는 것이 종교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으며, 성령의 권능 안에서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이른바 적극적 사고방식의 출세주의를 부추기는 신학적 기반을 오순절 교회는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게 만드는 반면, 사회 문제에 대해 외면하거나 침묵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대처하셨던 이유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적 성령 이해

기독교적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순간 그분의 머리 위로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한 다음, 예수님의 공생애 서막은 광야에서의 시험이었습니다. 그 시험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공생애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사단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였습니다. 인간적인 필요는 물론, 기적, 성공, 수치와 굴욕,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이용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기존의 가치관이 붕괴되는 충격과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충격과 혼란으로 고뇌하게 되고,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자기를 내어드리는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선지자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선지자적 삶과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압박을 가해오는 필요와 세상의 여론 앞에서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날아가 버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와 의의 실현을 위해 세상의 물결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실에 눈 멀게 만드는 세상 권세를 폭로하고,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삶의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은 그러한 사람들 역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5: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라고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평안을 약속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주는 부귀와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평화입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 곳곳에서 아름다움을 펼쳐낼 수 있도록 권능을 공급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섭리의 정연함을 드러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 더 이상 필요에 연연하지 않고 주어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누리고 감사할 줄 아는 창조 본연의 인간이 되게 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을 새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다른 모습이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필요에서 해방되어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기적 신앙'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번이라도 공중의 새처럼, 들에 핀 꽃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신뢰하며 맡겨본 적이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삶과 죽음 모두 그분 안에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참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흔들어댈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필요에서 해방되어 돈과 '기적 신앙'에서 벗어나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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