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요한복음 4:46-54).

함께 아파하는 마음(compassion)

뉴스 케이블 방송부터 설교단까지 오늘날 모두가 정죄하는 시류에 편승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가려내느라 진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걸으셨고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셨는지에 관해서는 문외한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닮도록 그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결단하고 순종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았는지를 재는 잣대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함께 아파하는 마음(compassion)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셨습니다. 그분이 율법을 따르지 않고, 어떠한 직책도 구하지 않고, 성전을 향해 분노하셨던 것도, 버림받은 이들을 치료해 주고 함께 식사를 한 것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그분 안에 끓어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상처받은 인간들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아무런 전제 조건도 없었으며 신학적인 요구도 하지 않으셨고, 유대인 신분증을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1세기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분은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환대와 치유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환대와 치유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환대와 치유를 행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compassion)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compassion은 함께 아파하는 마음, 애간장이 녹을 정도의 깊은 공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사랑을 쏟아 부을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 일은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도약을 요청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아라는 감옥에서 태어나 자아라는 감옥 속에 갇혀서 살아갈 운명을 타고 난 존재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타고난 원죄입니다. 우리가 중생한다는 것은 자아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갈 때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전해진 복음

요한복음 기자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이어서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3장에서는 유대교를 대표하는 인물인 니고데모에게, 4장 전반부에서는 목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과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리고 4장 후반부에서는 이방인 왕의 신하에게 구원의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하지만 오늘날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가톨릭을 포함해 다른 종파나 다른 종교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두 번 말해서 알아듣지 못하면 돌아서라는 것이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신자들을 지도하는 원리입니다. 그렇게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편협하고 분노에 찬 심판자들로 양육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왜곡하고 복음을 축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구원 받은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시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하나님 나라 백성인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그분의 원의였습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통치를 보여줌으로써 땅 끝까지 구원이 이르게 하는 빛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소돔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던 여호와의 모습은 세상 구원의 서곡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택함 받은 선민이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다른 민족들을 업신여기며 심지어 그들이 구원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 또한 똑같은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들 역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그리스도인들은 제자 공동체를 이루어 온 세상을 구원하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 속에 이루어지는 평화(샬롬)의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세상이 잘못된 곳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식에 절망한 사람들과 희생된 사람들이 교회로 다가와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르는 제자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능가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엄청나고 무한하게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요나서가 그걸 보여 줍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의 경고를 듣고 회개한 것에 분노한 나머지 죽으려고 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지 않고 심판하시기를 원했습니다.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지극히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나서의 메시지는 요나의 한계를 초월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주의 모든 생물에게까지, 심지어 육축에게까지 미친다고 선포합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요나서의 메시지는 신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보지 말고 큰 하나님으로 보라!"고 경고합니다. 회개한 니느웨에게,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요나에게 심지어 육축에게도 미치는 하나님의 자비는 은혜의 복음의 길을 예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대자대비한 사랑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이 오직 이스라엘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남의 멸망에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당연시되는 이방인의 도시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도시가 아니라 이방의 나라에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고 명하셨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엄청난 도전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무소 대론하고 굵은 베를 입었습니다(3:5).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3:10).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시자 요나는 실망을 합니다. 이방인은 회개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 그것도 선지자라는 요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섭섭해 합니다. 니느웨는 회개하여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데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는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모든 민족이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자기가 속한 종파와 교단 안에 들어와야만 구원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멸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자기 교회 안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는 배타적인 마음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니느웨에도, 불교의 도시에도, 이슬람의 도시에도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보내십니다. 인간의 타락은 이방의 도시 니느웨가 아니라 회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에 더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과일을 따먹고 죄를 지은 곳은 다름 아닌 에덴동산 중앙이었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요나도 깨닫지 못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믿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비를 베푸십니다. 회개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과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믿고 회개만 하면 인간을 용서하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인간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분이십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을 향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에게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의 몸은 거룩한 제물이 되며, 참된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단지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짐을 우리 자신의 짐으로 함께 질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 방법은 이제까지 기독교가 추구해 왔던 방식과는 많이 달라야 합니다. 옳은 것을 주장하고 다른 이들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격려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두려움을 퍼뜨리는 것은 엄청난 죄입니다.

우리가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연 주님이 가지셨던 것과 같은, 함께 아파하는 그 마음이 있는가를 늘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일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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