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고 완전한 분별은 없다

『완벽의 추구』의 저자 탈 벤 샤하르는 완벽주의자가 되지 말고 최적주의자가 되라고 조언한다. 그가 말하는 최적주의자란, 깊은 성찰을 통해 실패와 고통스러운 감정과 (일시적인) 성공까지 받아들일 줄 아는 건강한 현실주의자이며,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세워 성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비현실주의자가 아니라, 가파르지만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 목적지에 도착하면 축하하고 기뻐하면서 성공을 받아들이는 유연한 긍정주의자이다.

우리들의 분별도 마찬가지다. 이런 자세가 갖춰져야만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분별의 여정에 오를 수 있다.

“어떤 결과에도 승복하겠습니다, 주님! 분별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될 우리들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까지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주님! 지금 주어진 결과가 성공이라면, 그것이 크든 작든 하나님에게 온 것이라 믿습니다. 감사하고 축하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최적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세상은 우리에게 끝도 없는 완벽과 일등주의를 요구한다. 완벽해야만 성공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면서까지 자신의 일을 사랑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게 열광했고, 김연아의 한 치 실수도 없는 공중회전 스케이트 연기에 감탄했고, 발바닥이 기형이 될 때까지 지독하게 훈련해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된 강수진의 발레 연기에 찬사를 보냈다. 언젠가 한국 삼성그룹의 광고를 통해 알려진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섬찟한’ 캐치 프레이즈는 이 세상에는 중간자나 평범자는 없고, 오직 성공자 아니면  실패자만 있다고 한다.

독일 출신의 저널리스트인 클라우스 베를레는 그의 책 『완벽주의의 함정』에서, 완벽주의는 신앙과도 같다고 진단하며, “우리가 지금 빌 게이츠나 베컴 같은 사람들처럼 부유해지는 것은, 예전에 평민이 루이 14세와 같은 부자가 될 수 없었던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희박하다. 우습게도 우리는 그것을 더 쉽게 여기며,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고 개탄하면서, ‘때로는 적당히 좋은 것이 완벽한 것보다 낫다’고 조언한다. 우리는 언제 완벽한 집과 완벽한 배우자와 완벽한 직업과 완벽한 능력과 완벽한 사랑의 신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신앙의 범주라고 예외는 아니다. 효율이나 성과를 목표로 하는 세상의 완벽주의가 교회의 문턱을 넘어오면 문제가 더욱 더 심각해진다. 완벽주의라는 세속어가 교회와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을 위한 최선’이라는 그럴싸한 표현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의 가장 끔찍한 표현인 ‘비현실적인 목표의 선정’이 신앙 안에서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격상되면서 교회 성장과 선교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NG도 나오지 않는 완벽한 예배가 탄생했고,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용서될 수 없는 완벽한 제자양육 프로그램이 탄생했으며, 단 한번의 불협화음도 용서하지 않는 완벽한 성가대의 합창이 탄생했으며, 교회의 음향 스테레오부터 외관까지 그 어디에도 불완전함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교회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교인들의 삶은 완전해지지 않는 걸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라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2:9 말씀은 더 이상 매력적인 관점 포인트가 못 된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이나 불완전함을 자랑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런 것들은 교회 성장의 치명적인 방해물이고, 우리 자신의 일천한 수준을 드러내는 창피함밖에는 안 된다. 그래서 숨긴다. 이러한 인간들의 교회이건 교회가 아니든 간에, 인간들이 쳐놓은 완벽주의의 그물과 방패 때문에 성령의 바람은 불다가도 그치고, 오다가도 중간에 부딪혀 되돌아갈 수밖에는 없는 딱한 처지에 놓였다. 우리의 신앙도 완벽주의의 덫에 꽁꽁 걸려 있다.

하지만 이런 우리에게 희망은, 또 다른 바벨탑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분별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클라우스 베를레의 조언대로 우리들의 분별 역시 적당히 좋은 것을 찾는 것이다. 『완벽주의로부터의 해방』의 저자 데이빗 스툽은 ‘최고’와 ‘완벽’에의 집착은 어린 시절의 성장 환경에 그 원인이 있을 확률이 크다면서, 완벽주의의 주된 원인으로 ‘All or Nothing(이것 아니면 저것 혹은 전부 아니면 전무)’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지적한다. 이런 사고는 극단의 행복과 극단의 불행을 오고 간다. 중간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적으로 완벽한 분별은 없다. 탈 벤 샤하르의 조언과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 즉 최적의 상태에 있는 것’을 고르는 게 우리들의 분별의 목표’이다. 우리들의 분별의 목표는 ‘가장 적당한 것을 찾는 것’이지 ‘가장 완벽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인간인 우리들이 하는 분별은 둘(또는 셋이나 그 이상) 중에서 하나를 고를 때, 상대적으로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나을 거야’라는 정도의 확신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의견을 들어야겠어!’라고 두 손 불끈 쥐고 다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만나 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하나를 대신 골라 주시는, 척척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를 울부짖는다고 해서 갑자기 성령이 나타나 우리 입에 가장 맛있는 음식을 넣어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이 사업을 하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이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이 남자와 결혼하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이 학교로 가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간들의 완벽, 최고에 대한 집착에 감동감화하여 성령을 보내 우리에게 완전하고 완벽한 결정을 내려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복에 맞춰 덩달아 춤추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다(출 3:14).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나타나시는 자다.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오고 가라고 해서 가는 그런 값싼 애인 같은 분이 아니다. 만일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의 완벽주의에 교만과 확신이라는 왕관만 씌워줄 것이다. 이런 역할은 하나님이 아니라 주로 사탄이 맡는다.

완벽주의적인 성향보다 피조된 자, 사랑 받는 자로서의 겸손을 즐겨 받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도해 나가는 분별의 여정에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노력과 의지가 가미되면 인간들의 영광의 잔치로 끝날 것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완전한 분별의 청사진을 제공하시는 것을 조심스럽게 하신다.

하나님은 한국의 70-80년대에 성행했던 족집게 과외선생도 아니고 용하다는 미아리의 점쟁이도 아니다. 그러니 어떤 특정한 문제의 해결이나 분별이나 결정을 ‘완전히’ 그리고 ‘최고로’ 하기 위해 몸까지 상해가며 금식을 한다든지, 용하다는 예언자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느라 일상까지 제쳐두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런 우리들의 피나는 자구 노력들이 결국 하나님이 아닌 사탄만 좋게 한다면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이 세상의 온갖 비극들은 우리의 불완전한 분별의 결과라기보다 도리어 우리가 완전하다고 착각했던 무리한 분별에서 시작된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